
운명의 구원자
W. 갑쟝
쟝이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여름방학에 그의 부모님은 웬 이상한 사이비 종교를 믿기 시작했다. 원래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쟝의 어머니는 갑자기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알려줬다며 웬 촌스러운 팸플릿을 그에게 보여줬다. 디자인에 대해선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쟝이 봐도 구린 폰트로 "운명을 믿으십니까?"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처음엔 쟝의 어머니만 그곳에 다녔다. 쟝네 아버지는 성당 멀쩡히 다니다가 갑자기 왜 이러냐며 엄마를 말렸지만 사이비가 괜히 사이비가 아니더라. 2주 정도 지났을 때 쟝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기도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사람은 모두 '그 분'의 초인적 힘에 이끌려 운명에 맞춰 사는 거라고, 기도를 해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다 우리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는 부모님을 쟝은 집에서 보기 힘들어졌다. 그 뿐이었다. 영화처럼 돈을 다 가져다 바쳐 길바닥에 나앉는 일은 없었다. 집에 빨간 딱지가 붙지도 않았다. 그냥 삶의 한쪽에 ‘그’ 종교가 들어온 게 전부였다. 종종 아버지가 급하게 기도하러 나가며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걸 잊어버려 더운 날씨 탓에 벌레가 생기긴 했지만, 어머니가 장을 본 뒤 정리하는걸 잊고 기도를 나가 아이스크림이 모두 녹긴 했지만. 많이 심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안심했다. 걱정도 안 할 정도로 무관심했단 표현이 맞을지도. 금방 원래대로 돌아오실 거라고 생각했다. 이때 했던 안일하게 넘겼던 탓에 지금 벌을 받는 걸까.
겨울이 되자 쟝네 어머니는 돌연 직장을 그만두셨다. 아빠가 일을 하니 괜찮다고, 일하러 다닐 시간에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게 더 낫다며 말하는 어머니의 웃는 얼굴을 보자 쟝은 온몸에 소름이 확 끼쳤다. 매일같이 봐온 웃는 얼굴인데 그 순간 만큼은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께름칙한 기분을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다. 학교를 마친 뒤 집에 들어가면 너도 함께 기도하러 다니자고 끈질기게 설득하려는 부모님의 모습이 무서워 쟝은 집을 피하게 됐다. 그렇게 다니기 싫던 학원을 필사적으로 다녔다. 주말엔 종일 피시방에 죽치고 있다가 조용히 집에 들어가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분명 전과 같이 쟝에게 다정한 부모님이지만 전과 같지 않았다. 가족을 볼 때마다 이질감이 든다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다. '나비효과'라는 말을 떠올렸다. 미세한 변화나 작은 사건이 추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로 이어지는 것. 여름에 쟝이 그냥 지나쳤던 날벌레들과 녹은 아이스크림은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본인이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곧네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 건 당연했다.
그러한 죄책감에 하루는 주일미사를 보러 성당에 갔다. 묘하게 구린 기분에 속으로 꿍얼거리며 성당에 들어가던 중 성당 입구에 서 있는 성모상이 눈에 들어왔다. 성모상은 그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러게 성당에 잘 나오지 그랬니, 하고. 예수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빌어보면 우리 부모님을 원래대로 돌려주시지 않을까, 예수님이 진짜 존재한다면 성당을 꼬박꼬박 나오던 우리 부모님을 왜 저렇게 만드신 걸까, 내가 성당도 잘 안 나와서 그런 걸까 따위의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본당으로 올라가던 중 계단 위쪽에서 아주머니들의 얘기 소리가 들렸다.
“자기들 그거 알아? 저기, 헬레나네 집 말이야.”
(헬레나는 쟝의 어머니의 세례명이다)
“들었어. 무슨 사이비종교에 빠졌다며?”
“엘리사벳이 왜 요즘 성당에 안 나오냐고 물어봤더니 운명에 따라야 한다는 말만 반복해서 했다더라. 참 무서워, 그치?”
쟝네 집은 이미 소문의 중심에 있었다. 언제 이렇게 소문이 난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오지 말걸. 얼굴이 화끈거려 쟝의 두 눈에 열이 쏠렸다. 시야가 뿌예져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잔뜩 줬다. 주위에 보는 눈이 몇 있었고, 무엇보다 이런 일로 울기엔 자존심이 상했기에 울음을 참았다. 건물 밖으로 나와 혹시나 누가 알아볼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가던 중 누군가와 부딪혔다.
“죄송합니,”
“쟝?”
고개를 들어 확인해보니 마르코였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필 이런 상황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칠게 뭐람.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걸 못 들은 척하고 도망쳤다. 길에서 질질 짜기엔 쪽팔려서 눈에 힘을 부릅뜬 채로 땅만 보고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걸어 집 앞 놀이터에 도착했다. 놀이터엔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주머니 두 분만 계셨다. 그네에 걸터앉아 발을 굴렀다. 집에 들어가지도, 성당에 가지도 못해 얼굴과 손 끝이 차게 식은 채로 집 앞 놀이터 그네에 앉아있는 자신의 처지가 제법 처량해 눈물이 흘렀다. 씨... 나 진짜 안 울려고 했는데. 중얼거리며 손으로 눈가를 대충 닦았다. 찬 바람에 튼 살이 눈물에 짓눌려 얼굴이 쓰렸다. 이 상황이 분했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부모님을 말릴 텐데. 성당이나 열심히 다니라고 툴툴거리기라도 했을 텐데. 이렇게 심해지기 전에 말렸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과거의 자신을 향한 질책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주머니들은 쟝이 있는 쪽을 흘끔거리다 자리를 떠났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청승맞게 눈물을 흘리고 10분쯤 뒤에, 누군가 가쁜 숨소리를 내며 쟝의 앞에 멈춰 섰다. 마르코였다. 추운 날씨에 뛰어온 건지 양 볼과 코 끝이 새빨갰다.
"너 뭐야? 미사 안 가냐?"
"응, 오늘은 안 가도 괜찮아."
거짓말. 좀 전에 성당 앞에서 만났으면서. 대꾸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마르코도 별 다른 말 없이 옆자리 그네에 앉았다. 마르코는 주머니에서 편의점에서 파는 따뜻한 유자차를 꺼내 쟝에게 건넸다.
"추우니까 이거 손에 들고 있어."
눈가의 눈물 자국의 이유도, 성당에서 뛰쳐나온 이유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배회하는 이유도.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유자차만 건넸다. 건네받을 때 닿은 손 끝이 차가웠다. 본인이 추운 건 생각도 안 하고 쟝의 것만 사 온 것 같았다. 따뜻한 유자차를 손에 쥐고 아무 말도 안 하며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느 정도 진정하고 훌쩍거림이 잦아들자 쟝에게 몰려드는 건 수치심이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 마르코를 바라보니 저를 쭉 쳐다보고 있었던 건지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고개를 피했다. 발 끝으로 모래를 툭툭 찼다. 신발이 더러워지는 건 개의치 않았다. 신코 끝을 쳐다보며 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네가 얘기하고 싶으면 나한테 해주겠지 싶어서? 말 하기에 힘든 말을 내가 억지로 물어보면 실례잖아."
"안 궁금하냐?"
"궁금하긴 한데... 하기 싫은 말은 억지로 안 해도 괜찮아, 쟝."
쟝은 이상하게 그 말을 들으니 마르코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원래 이런 건 상대방이 괜찮다고 하면 더 말해주고 싶은 법이었다. 어디 말하기도 그래서 속으로만 끙끙 앓던 고민을 마르코라면 얘기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쟝은 얘기를 꺼냈다. 작년부터 엄마랑 아빠가 이상한 사이비에 빠졌고, 처음엔 괜찮은 줄 알고 넘어갔는데 아니었다. 이렇게 된 게 다 내 탓 같고 요즘엔 집에 들어가는 것 조차 버겁다... 말 하는 건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아까는 도대체 왜 울었던 건지 싶을 정도로 덤덤하게 말했다. 쟝은 머쓱하게 웃으며 마르코 쪽을 바라봤다. 이게 다야, 별거 없지? 마르코는 아무런 대답 없이 얘기를 듣다가 말을 꺼냈다.
"그거 네 잘못 아니야, 쟝. 너는 잘못 없어.."
그 말을 들은 쟝의 눈엔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자신을 옥죄던 죄책감을 조금은 덜어낸 느낌이었다. 이날 마르코는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리는 쟝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 주었다.
마르코와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 간 어린이 미사에서 쟝은 마르코를 만났다. 제멋대로인 저에게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다 맞춰주던 마르코는 쟝에게 항상 좋은 친구였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도 같은 곳으로 배정받았다.
“쟝, 고등학교도 같이 다니겠네? 다행이다.”
“야… 너는 질리지도 않냐?”
“응. 난 좋은데?”
말은 저렇게 했지만 절대 질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전날 밤 혹여나 다른 고등학교에 배정받을까 무서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쟝은 마르코가 성당에서 도망치던 자신을 따라온 그 날부터 그를 좋아했다.
마르코는 쟝에게 있어 구원이었다. 삶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부정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처음엔 그냥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감정이 자각하고 나니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의식하지 않으려 할 수록 몸의 온 신경이 그 애를 향해있었다.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면 애쓸수록 생각이 났다. 그전까진 아무렇지 않게 받던 마르코의 친절이 이제는 쟝의 볼을 새빨간 색으로 물들였다. 처음엔 그냥 친구로서 좋아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던 쟝은 몇 번이나 빨개진 귀를 감추며 마르코를 피한 다음에야 가까스로 제 마음을 인정했다.
마르코랑 사귀고 싶은 건 아니었다. 사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쟝은 주위에서 자신과 마르코를 두고 뭐라고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둘이 안 어울린다는 말이 다분했다. 둘이 친하다고 하면 의외라는 눈빛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마르코는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친절하고 공부도 잘해 선생님들께도 귀염받는 반면 자신은 반에서 시끄러운 애 1 정도를 맡고 있었다. 거기다 둘 다 남자인데 어떻게 사귄단 말인가. 마르코가 제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면 다행이었다. 쟝은 마르코에게 남자를 좋아하다니, 더러워! 따위의 대사를 들으며 경멸 어린 시선을 받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마르코가 자신과 비슷한 좋은 여자를 만나 남들처럼 가정을 꾸릴 때 주변인으로나마 남아서 지켜보고 싶었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그 애의 행복을 바라니까 보내주자,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눈물로 지새우는 밤이 잦았다. 유치원 때 댄스파티 파트너를 거절당했을 때보다 슬펐고, 중학생 때 옆 반 여자애에게 고백했다가 내가 널 왜 라는 대답과 함께 차였을 때보다 슬펐고, 좋아하던 옆집 대학생 누나의 키스 장면을 목격했을 때보다 슬펐다. 전에 페북 감성 페이지에서 본 글귀가 생각이 났다.
“누군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보면
누군가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맞는 말이었다. 마르코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 수록 쟝은 그 애를 얼마나 자주 떠올리는지를 온 몸으로 느낄 뿐이었다. 감정을 숨기는 게 힘들어질 때쯤 쟝은 맘을 접으려 애썼다. 그러나 사람 맘이 그렇게 쉽게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것이던가. 마르코를 떠올리느라 잠을 자기 힘든 날이면 꼭 기도를 하고 잤다. 믿지도 않는 신을 모두 부르면서. 예수님 공자님 부처님 알라신님... 마르코의 운명의 상대가 있다면 꼭 저였으면 좋겠어요. 제가 아니라면 걔는 운명의 상대가 없어도 됨. 그리고 저희 엄마랑 아빠가 정신 좀 차리게 해주세요. 기도를 마치고 나면 그렇게 싫어하는 신과 운명을 찾는 자신의 모습이 참 우스웠다. 신이 존재한다면 지금쯤 저 하늘 위에서 자신을 보고 기막혀 할 듯싶었다. 부모님 때문에 원망할 땐 언제고 필요할 때만 찾는다면서.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쟝에게 기댈 곳이라고는 존재의 유무도 알지 못하는 신 뿐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갖 사탕발림과 함께 기도를 하곤 했다.
고 1이 된 후 입시 상담 주간이 찾아왔다. 쟝은 내심 엄마가 안 왔으면, 싶었지만 아들 학교 상담엔 당연히 가야 하지 않겠냐고 답한 쟝의 어머니였다. 엄마가 학교에 찾아오셔서 쟝은 방과 후 보충 수업을 빠지고 교무실에 갔다. 멀끔히 차려입고 교무실 앞에서 저를 기다리는 엄마의 모습에 쟝은 속으로 안심했다. 설마 학교에서까지 그러겠냐고 생각을 했다. 별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절망 플래그였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평화롭다고 생각하는 순간 악당이 등장하듯이, 알바생이 오늘은 일 할 거리가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손님이 몰아치듯이,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쟝이 괜찮겠지 하고 생각했다가 일이 심각해졌듯이. 상담은 초반엔 원활히 진행되었다. 선생님은 쟝을 성실한 학생이라고, 성적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말씀하셨고 쟝의 어머니도 웃으며 그 말을 듣고 계셨다. 대학 진학 얘기가 나오자 일이 터졌다. 이 정도면 이 대학들을 갈 수 있다, 좀 더 노력하면 이곳도 노려볼 만 하다, 가정에서 신경 좀 써주시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 쟝의 어머니는 입을 열었다.
"자기 운명대로 가겠죠, 뭐."
"네? 아... 운명이요? 하하, 그렇죠. 그래도 노력을 하면 더 좋은 곳도 갈 수 있다는,"
"그래서 열심히 기도 중이에요. 사람은 모두 본인의 운명에 맞춰 사는 거잖아요. 운명을 관리하시는 그 분께 열심히 기도해주고 있어요. 쟝도 같이 기도를 했으면 좋겠는데..."
"어머니? 그게 무슨..."
"선생님은 요즘 안 풀리는 일 없으신가요? 제가 같이 기도해드릴게요."
쟝은 어머니가 운명이라는 말을 입에서 꺼낸 바로 그 순간부터 머리가 하얘졌다. 상담을 잘 끝낼 수 있었는데 교무실에서 이런 망신이라니... 분명 칸막이로 가려져 있는데 다른 선생님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쟝은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엄마, 이 정도면 상담 많이 했잖아. 이제 가."
"무슨 소리니? 지금 선생님께 좋은 얘기 해드리려고 하고 있잖아."
"뭐가 좋은 소리야? 그냥 가. 저 엄마 좀 모셔다드리고 올게요."
"어, 어... 그래. 그러렴."
"얘가 왜 이런담... 선생님 혹시 운명에 관심 있으시면 저한테 전화를,"
"그냥 가라고!"
버럭 소리를 지른 쟝은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쟝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어머니는 계속 운명 얘기를 했다. 너는 애가 왜 그러냐, 지금 너희 선생님께도 좋은걸 알려드리려고 하지 않냐, 복도에서 이래저래 큰 소리로 얘기하는 쟝의 어머니에게 여기저기서 시선이 꽂혔다. 수업 중인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창문 너머로 시선을 보내는 게 온 피부로 느껴졌다. 쟝은 한시라도 빨리 어머니를 이 학교 바깥으로 내보내고 싶었다. 소문의 중심이 되는 일엔 이제 진절머리가 났다. 이 상황을 목격하는 게 한 명이라도 적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차장까지 가 어머니의 차 앞에 섰을 때 쟝은 꽉 쥐고 있던 어머니의 손목을 놨다.
"집에 가. 다음부턴 학교 안 와도 돼. 그냥 가."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학교로 올라왔다. 교무실로 돌아가 선생님께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하다고 사과한 후 몸이 안 좋아서 먼저 들어가겠다고 했다. 선생님의 표정이 많이 당혹스러워 보였다. 쟝은 그 길로 바로 학교 밖으로 나왔다. 자주 가던 피시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가방을 학교에 두고 온 게 생각이 났다. 아... 지갑 거기 있는데. 문을 열려고 뻗었던 손을 다시 주머니에 꽂았다. 학원을 가기엔 시간이 비었고, 당연한 얘기지만 집에 가긴 싫었다.
갈 수 있는 곳은 집 앞 놀이터 뿐이었다. 놀이터엔 여전히 사람이 얼마 없었다. 역시 요즘 애들은 집에서 게임 하는 게 더 좋은 건가... 주위를 둘러보니 벤치에 아주머니 두 분만 앉아서 수다를 떨고 계셨다. 그네에 걸터앉았다. 자신도 이 상황이 어이없었다. 내가 왜 이래야 하는 거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발로 모랫바닥에 장난을 쳤다. 반년 정도 전에 성당에서 도망쳤던 기억이 났다. 사이비에 빠진 부모님은 쟝을 계속해서 도망치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엄마가 학교에 오지 못하도록 막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쟝은 계속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서럽고 짜증이 났다. 저를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한 부모님이 정말 원망스러웠다. 계속 발로 모래 장난을 치다가 핸드폰을 켜서 페북을 눌렀다. 12분 전 올라온 같은 반 친구의 스토리엔 석식 식판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돈가스랑 새우튀김 우동? 그걸 보니 잊고 있던 배가 고팠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석식 먹고 올걸. 쟝이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을 때, 시야에 낯익은 신발이 들어왔다. 어? 이거 데자뷔. 이렇게 놀이터로 도망쳐서 그네에 하염없이 앉아있다 고개를 들면-
"쟝!"
마르코였다.
"너 여긴 어떻게 알고 왔냐?"
"쟝, 너 혼자 이렇게 가방도 두고 오면 어떡해. 놀라서 찾았잖아."
자세히 보니 마르코는 가방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쟝이 수업이 끝나도 교실에 들어오지 않자 선생님께 물어보고 먼저 갔단 소식을 들은 후 급하게 가방을 챙겨서 이곳으로 온 모양이었다.
"배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
"야, 지금 밥 먹으러 가면 학원 수업 늦는 거 아냐?"
"괜찮아, 오늘 학원 안 가도 돼."
거짓말. 쟝은 학원 안 가도 괜찮은 날이 어디 있느냐고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도 마르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충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머리가 좋은 마르코는 눈치챘을 확률이 높지만, 아무튼. 가방을 챙겨다 주고 (아마도) 자신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학원도 째놓고 자세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는 마르코를 보며 쟝은 오늘도 남몰래 귀를 붉혔다. 마르코의 손에 이끌려 맥도날드로 갔다. 마르코는 자연스럽게 쟝이 평소 먹는 걸 주문했다. 맥치킨 모짜렐라 세트 치즈스틱으로 바꿔주시고요 음료는 사이다로 바꿔주세요. 번거로운 제 입맛을 기억하는 마르코에 쟝은 또 다시 귀를 붉혔다.
"얼마였어? 이따 집 가서 보내줄게."
"아냐, 나 어제 용돈 받았어. 내가 살게."
또 거짓말. 쟝은 마르코가 용돈을 받으려면 아직 일주일 정도 남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주지? 보통은 친구가 기분이 안좋은 일이 있어 보인다고 학원을 빠지고 밥을 사주며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하지 않는다. 쟝은 이런 점을 생각하다 보면 마르코에게 이 정도로 챙김 받는단 사실에 조금은 우쭐해지는 것이었다. 햄버거 세트를 깔끔하게 끝내고 둘은 피시방으로 향해 끝내주는 게임을 했다. 쟝 혼자. 마르코는 게임도 할 줄 모르면서 쟝 옆에서 멀뚱멀뚱 구경하다, 인강을 듣다 했다. 10시가 되고 밖으로 나오자 어두컴컴했다. 이제 갈 곳도 없는데 쟝은 아직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마르코는 이런 쟝의 속내를 눈치챈 건지 놀이터에서 조금만 놀다 가자고 하더니 그를 그네에 앉혀두고 잠시 편의점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잠시 후 돌아온 마르코의 손엔 아이스크림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하나씩 입에 물고 가만히 있었다. 아무도 없는 늦저녁의 놀이터는 낡은 그네가 끼익 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적막을 깨고 쟝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짝사랑 상대 앞에서 추한 가정사를 줄줄 부는 바보 천치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면서.
"있잖아 마르코, 나는... 운명이 너무 싫어."
"..."
"운명도 싫고, 그게 뭐라고 거기에 목숨이 걸린 것마냥 구는 엄마 아빠도 너무 싫어. 맘 같아선 엄마랑 아빠한테 화내고 집을 나와버리고 싶어. 근데 이러나저러나 나한텐 하나뿐인 가족이잖아. 내가 형제가 있냐 뭐가 있냐? 그래서 맘껏 미워할 수도 없고 화낼 수도 없어. 이것마저도 내 맘대로 안돼. 심지어 계속 진작에 말리지 않은 내 잘못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한단 생각이 들어. 네가 그때 내 잘못 아니라고 말 해줬는데도. 이것도 그 잘난 운명인가 봐. 평생 사이비에 빠진 부모님을 매정하게 끊지도 못하고 계속 쪽팔리게 살 그런 운명. 진짜 웃기지 않냐? 운명이 뭐라고 내 인생을 통째로 뒤집어놔... 짜증 나게."
마르코는 묵묵히 쟝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것마저 반년 전과 같았다. 쟝이 말하는 동안 그의 손에 들려있던 아이스크림이 녹아 흐른 걸 발견하곤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끈적거리는 그의 손을 닦아줬다. 쟝은 방금 추한 모습을 다 보여놓고도 이런 배려에 속없이 설레는 제 마음이 우스웠다. 마르코는 무슨 말을 할까.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마르코는 쟝의 손을 닦아준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
"진짜 네 잘못 아니야, 쟝. 이 일에 네 책임은 하나도 없어. 그리고 나는 운명이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소리야?"
"물론 내가 너의 사정도 잘 모르는 채로 왈가왈부 할 일은 아닌데... 너무 우울해하진 말란 소리야. 이렇게 말 한다고 우울감을 바로 떨쳐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운명은 생각보다 사소하다고 생각하거든. 너랑 내가 만난 것도 어떻게 보면 운명이니까. 어릴 때부터 너랑 친구로 지내서 지금 네 옆에 내가 앉아있는 것도 운명이고. 그리고 이 상황에 말하긴 조금 그렇지만... 나는 가끔 내가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운명이면 좋을 것 같단 생각도 해."
"뭐?"
"나는... 내가 너의 운명이었으면 좋겠어."
쟝은 내내 바닥에 처박혀있던 시선을 들어 마르코를 바라봤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잘 들은 게 맞나? 마르코는 시선을 못 마주친 채로 귀와 목덜미를 붉히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쟤 말은 자기가 나랑 운명이면 좋겠단 거잖아.
"이렇게 말 할 생각은 없었는데, 하하..."
마르코는 그냥 운명 때문에 너무 힘들어 하진 말라는 소리였다며 열심히 변명을 했지만 울음이 터져 귀가 먹먹해진 쟝에겐 들리지 않았다. 오늘 하루를 저를 위해 쓴 것 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벅찬 하루였는데, 이런 말까지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마르코도 자신과 같이 서로의 운명이길 바랬단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기뻐서 감정을 주체할 겨를도 없이 눈물이 울컥 흘러나왔다. 부끄럽다는 듯이 시선을 떨구고 눈을 피하던 마르코는 훌쩍이는 소리에 놀라 쟝을 바라봤다.
"쟝, 왜 그래?"
쟝이 대답 없이 계속 눈물만 뚝뚝 흘리자 마르코는 그의 앞에 서서 어정쩡한 자세로 안아 달래주었다.
"쟝... 혹시 방금 내가 말 한 게 싫어서 그래? "
"아니... 좋아서."
쟝이 마르코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마르코가 놀라서 쟝의 어깨를 붙잡고 상기된 표정으로 물어봤다. 진짜? 쟝은 방금 전까지 눈물을 흘린 제 얼굴이 추해 보일까 봐 손으로 허겁지겁 얼굴을 가렸다. 마르코는 진짜 좋다, 라는 말만 반복하며 쟝을 다시 안아주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놀이터에서 올해 최고의 로맨스 영화 한 편을 찍었다. 12시즈음 마르코는 쟝을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쟝은 2년 만에 처음으로 집에 들어오는 길이 힘들지 않았다. 집 앞에 도착한 뒤 마르코는 쟝에게 우리 이제 2일이야, 라고 말했고 쟝은 오글거리게 왜 그러냐고 짜증을 내며 귀를 붉혔다.
그날 저녁, 쟝은 다시 생각했다. 운명에 냅다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하고.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내일 학교를 어떻게 가나 했던 머릿속이 빨리 내일이 됐으면 하는 기분으로 바뀌었다. 듣기만 해도 저를 괴롭게 만들던 운명이라는 단어에 오늘은 실실 웃고 있었다.
아마 마르코는 쟝의 부모님을 사이비에서 구해낼 수도, 그를 이 상황에서 구해줄 수도 없을 터였다. 영화처럼 모든 일을 척척 해결하지도 못할 거고, 어쩌면 그와 함께 지내는 동안에도 오늘같이 힘든 일이 많이 일어날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코는 쟝이 유일하게 숨통이 트이는 상대였고, 그가 바라는 운명의 상대였으며, 동시에 그의 구원자였기에. 쟝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 잠들기 전에 기도를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