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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역

W. 챌

​*현대AU

“저기요.”

“…네?”

“그쪽 혹시….”

 

마르코는 침을 꿀떡 삼켰다. 누가 봐도 껄렁한 자세. 귀에 뚫린 검은색 피어싱. 추켜 올라간 눈꼬리까지. 무언가 하지도 않았는데 잘못한 기분에 저절로 눈이 뱅글뱅글 돌았다. 마르코는 이 기차에 올라탈 때까지 제가 지금 앞에 서 있는 갈색 머리의 남자에게 뭘 잘못했는지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짚어봤다. 아무리 해도 역에서부터 에스컬레이터를 지나 플랫폼에서 3분 동안 기차를 기다리고, 이 기차에 올라탈 때까지 누구 하나와 어깨를 부딪치거나, 발을 밟거나 그런 건 전혀 없었다. 갈색 머리는 여럿 있었지만, 이렇게 눈에 띄는 우유를 한 숟가락 탄 부드러운 갈색 머리를 본 적도 없었다.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한 게 티가 난 건지, 의자에 앉은 저를 험악하게 짐칸에 손을 턱 얹어 얼굴을 들이민 남자는 몸을 뒤로 당겼다. 그러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칼이라도 꺼내나?! 사람의 생각은 수만 가지 갈래로 뻗어간다. 마르코는 여기서 제가 칼에 찔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남자의 카키색 얇은 야상에서 나온 건 과도도, 식도도 아닌 단순한 종이 쪼가리였다. 흰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기차 번호와 날짜, 종착지. 그리고 자리 번호가 적혀있는. 남자는 종이와 마르코를 두어 번 번갈아 보다가 음. 맞는데?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그쪽이 앉으신 자리 혹시 제 자리 아닌가요?”

 

남자가 마르코에 눈앞에 들이민 표에 적혀진 자리는 D6. 마르코가 현재 앉아있는 자리도 D6 남자의 목적은 이것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마르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반으로 접었다. 마르코의 소리 높은 사과에 모두의 눈이 건장한 남성 둘에게 향했다. 집중된 시선에 마르코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마르코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리며 괜찮다고 사람 좋게 웃은 남자는 옆으로 맨 큰 가방을 짐칸 위에 올려두고, 마르코가 비킨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말 한마디에 사람의 인상이 변한다. 아까까지만 해도 불량해 보이던 남자는 이제 꽤 젠틀맨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마르코는 이런 실수를 해놓고 4시간이나 앉아서 가야 한다니. 아직도 가라앉지 않는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어디까지 가세요?”

“아, 꽤 오래 가요 아마 종착역까지….”

“저돈데, 제가 이걸 많이 사서요. 하나 드실래요?”

 

마르코의 앞으로 이온 음료가 담긴 불투명한 흰색의 페트병이 쑥, 나타났다. 페트병을 잡은 남자의 손이 참 굵은데 곱다고 생각하던 마르코는 앞에서 안 받냐는 듯이 흔드는 페트병을 받으며 이번엔 말 대신 고개를 꾸벅하는 것으로 감사를 대신했다. 아까의 소동은 없었다는 듯 고요한 기차는 기차만이 굴러가는 소리가 가득했다. 마르코는 앞에 걸어둔 가방에 손을 넣어 집에서 챙긴 이어폰을 찾으려고 했다. 분명 이쯤에 넣어둔 것 같은데, 마법의 주머니인 가방은 이어폰은 원래 없었다는 듯 텅텅 비어있었다.

되는 일이 없네. 마르코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근래 지속되었던 스트레스성 두통이 더 악화된 기분이었다. 의자에 머리를 툭 기댄 마르코는 옆에 앉은 남자가 준 페트병 뚜껑을 돌렸다. 딸깍, 문이 열리고 물이 목구멍 안으로 넘칠 듯이 들어왔다. 시원하고 약간 단맛이 첨가된 이온 음료는 꽤 평소 이런 종류의 음료를 즐기지 않았던 마르코의 입맛에 딱 맞았다. 새로운 음료에 눈이 커진다. 옆의 남자는 언제부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는지, 느껴진 시선에 마르코는 옆을 돌아봤다. 마주친 눈이 흡족해하며 올라간 꼬리가 아래로 쑥 내려갔다.

 

“이거 꽤 맛있네요.”

“그렇죠? 아, 통성명을 안 했네. 저는 쟝, 쟝 키르슈타인.”

“마르코 보트요. 그나저나 아까는 실례했어요. 정말…. 괜히 부끄럽네요. 이거.”

“괜찮다니깐요. 아 혹시 이름으로 불러도 돼요?”

“그럼요. 말도 편하게 할까? 쟝?”

 

키득키득 웃는 남자의 얼굴이 사뭇 낯설지 않는다. 마르코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제 고개를 따라서 똑같이 갸우뚱거리는 남자는 꽤 고양이 같았다, 유명한 반쯤 눈이 감긴 주황빛 고양이 캐릭터. 상상하니 비슷하네. 혼자서 풉, 하고 웃은 덕분에 제 얼굴이 웃기냐며, 말문이 더 트인다. 옛날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면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마르코는 그와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다. 4시간은 꽤 긴 시간이었다. 목이 아플 정도로 쉬지 않고 마르코와 그는 서로 대화를 얻었다. 마르코가 이 대화에서 얻은 그의 정보는, 자신보다 두 살 어리다는 것과 현재 직업은 밴드 보컬을 하고 있다는 점. 지금은 아픈 부모님을 대신해 고향에 있는 카페를 운영하러 이 기차에 탔다는 점, 그리고 잘 팔리지 않을 것 같은 꽤 특이한 이온 음료를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기차가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들어간다. 자주 보지 않아도 익숙한 풍경이 눈에 서서히 밟혔다. 이번 역은 이 기차의 종착역입니다. 일정한 음성이 귀에 꽂힌다. 마르코는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말을 하다 피곤했는지 역에 도착하기 1시간 전쯤에 잠든 이 남자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 달렸던 기차는 달콤한 휴식을 취하려는 듯 기차역에 우뚝. 멈췄다. 저기, 쟝. 마르코가 아무리 불러도 그는 으음, 하며 몸을 뒤척일 뿐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기차 내에 단둘이 남았을 때, 그는 비로소 눈을 떴다. 샐쭉 올라간 눈이 한껏 커졌다.

 

“왜 안 깨웠어?!”

“한 스무 번…. 부른 것 같은데.”

“아우 씨…. 미안해. 이번엔 내가 폐를 끼쳤네.”

“자는 모습이 꽤 귀여웠는데 뭘, 이걸로 쌤쌤이네.”

 

제 말에 그의 볼이 붉어진 건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정신을 놓고 잔 모습을 보인 탓일까, 마르코는 말이 없어진 그를 보며 생각했다. 역 이름은 같아도 사는 동네까지 바로 옆이긴 어려운데. 우연히도 둘의 방향은 같은 방향이었다. 덕분에 마르코는 택시비를 아낄 수 있었다. 온라인 뱅킹으로 돈을 보내준다는 이름하에 마르코는 그의 번호를 얻었다. 그의 번호를 저장하자마자 메신저에 뜬 그의 프로필 사진은 꽤 활동적인 자기 사진이었다. 아마 여자한테도 인기가 많지 않을까…. 마르코는 얼마 없는 주변 친구들의 주최로 나간 미팅에서 실패한 추억이 떠올랐다. 기억해서 별로 소득이 없는 추억은 머리를 양옆으로 붕붕, 휘둘러 없앴다.

오랜만에 방문한 집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어린 시절 추억을 회상하기엔 종종 본가에 내려왔던 마르코였고, 딱히 추억할 건더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에 들어서자 얼굴을 마주한 건 제 형뿐, 집에는 엄마도, 아빠도 없었다. 두 분 다 일정 있어서 나가셨어. 라는 형의 말에 마르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벗었다. 방에 들어와 갈색 코트를 걸어두고, 옷을 갈아입은 마르코는 모양으로 들고 다니냐는 말을 자주 들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10여 분 전에 온 새로운 알림이 잠금 화면의 배경을 가렸다. [잘 들어갔어?] 그다.

 

[응 덕분에]

[참 돈은 얼마나 보내줘야 해?]

[음…. 얼마 안 나왔는데. 괜찮아~]

[안돼. 돈거래는 정확하게 하는 거랬어, 우리 엄마가.]

[그럼 나중에 밥이나 같이 먹자. 그럼.]

[응응.]

 

마르코는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툭툭, 치며 침대에 털썩 누웠다. 방금까지도 자신이 방 한가운데에 서서 문자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꽤 새로웠다. 이렇게까지 집중할 상대가 있었나 싶은 마르코는 집중했던 핸드폰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두고 바닥에 놓은 가져온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들어 허벅지 위에 올렸다. 쓰다가 막힌 글의 문단이 눈에 들어왔다. 깜빡거리는 커서에도 더는 내용을 이어갈 수 없었다. 노트북을 연지 5분도 안 돼서 다시 닫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만 깜빡, 깜빡 쳐다봤다. 기차를 타고 오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부쳤는지, 마르코는 눈을 감았다.

 

 

*

 

 

 

…르코!

……르코!!

 

저 멀리서 누가 부르는 소리에 마르코는 뒤를 돌아봤다. 앞에도 뒤에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이 검은 공간에서 오직 가늠할 수 있는 건 희미한 목소리일 뿐. 마르코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내딛은 곳이 앞쪽인지 뒤쪽인지는 분간할 수 없지만, 점점 무릎이 굽히는 각도가 거세지는 게 오르막길을 오르는 느낌은 충분했다.

 

마르코!

 

목소리가 선명하다. 사람의 실루엣도 보였다. 마르코는 자신을 등지고 바로 앞에서 자신을 애타게 찾는 사람의 어깨를 잡았다. 사람이 뒤돌자마자 훅,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에 마르코는 눈을 번쩍, 떴다. 아까와 같은 본가의 자신 방 천장이었다. 짧은 꿈이었는데도 마르코의 옷은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찝찝한 꿈에 마르코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꿈이라고 해도 아직 손바닥에 남아있는 온기에 손을 한 번 접었다가, 다시 쫘악 펼쳤다. 단단한 어깨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경도. 마르코는 온몸을 넝쿨처럼 휘감은 느낌을 떨쳐내고자 방에서 나와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한 꺼풀 한 꺼풀 벗을 때마다 계절의 온도를 담은 공기가 몸에 달라붙어 닭살을 일으켰다. 따스한 물이 찝찝함을 씻어 내린 느낌에 마르코는 젖은 머릿결을 수건으로 탈탈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마르코, 샤워했니?”

“네에, 엄마 생각보다 늦게 오셨네요.”

“그럴 일이 있었어. 참, 맞다. 네 작업실 이제 정리 좀 해야지?”

“그럴게요.”

 

마르코는 수건을 목에 걸며 이번에는 자신의 방이 아닌 다른 방의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따뜻해진 손과 차가운 금속이 만나서 그런지 순간 소름이 팔을 타고 목까지 뻗쳤다. 마르코는 손잡이를 돌려 방문을 열었다. 캄캄한 어둠 속이 아까 꿈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근데 무슨 꿈이었더라. 마르코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손을 뻗어 벽을 더듬었다. 툭, 튀어나와 존재를 알리는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달칵, 하고 켜지는 등불 아래에는 꽤 쌓인 먼지가 폴폴 휘날렸다. 마르코는 코 앞부분을 손으로 휘휘 저으며 여기저기 쌓인 상자들 사이로 발을 내딛었다.

 

집에서 출가하기 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짐이 굳건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쳐 허겁지겁 나오느라 상자가 꽤 많이 있었다. 다 마르코의 물건들이었다. 좋아했던 소설, 시집, 수필부터 시작해서 졸업식 때 동아리 후배들에게 받은 롤링페이퍼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오랜만의 추억팔이에 마르코는 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근래에 이렇게까지 몽글했던 기분이 있었나, 지금 같은 기분이 유지가 된다면 막힌 글의 뒷부분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씁쓸한 기분에 마르코는 입을 쩝, 다셨다.

 

방 안에 있는 상자를 거의 다 열어보는 바람에 아까보다 방은 더 어질러진 기분이었다. 방 안에 걸린 시간은 벌써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고, 마르코는 더 어질러진 참에 내일 아침에 정리하자며 상자들 가운데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꽤 수그리고 앉았던 탓에 어깨가 걸렸다. 마르코는 팔을 위로 쭉, 들어 기지개를 켰다. 허리를 옆으로 살짝 돌리다가 시선에 걸린, 조금 다른 상자가 눈에 띄었다. 종이로 된 상자들 사이에 누런 천으로 되어 낡은 녹색 손잡이가 달린 상자. 마르코는 손잡이를 잡아 구석에 있는 상자를 주욱, 끌어당겼다. 꽤 많은 것이 들어있었는지 상자의 무게는 꽤 나갔다.

 

구석에 있던 탓인지 상자 위에 먼지가 가라앉았다. 마르코는 손으로 먼지를 툭툭 털었다. 거뭇해진 손으로 상자의 뚜껑을 연다. 무수히 많은 인쇄된 사진들이 마르코를 반기고 있었다. 사진 속 주인공은 마르코 저 자신과. 남자. 기차에서 봤던 남자.

 

마르코!

 

꿈속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선명해진다. 고장이 나서 계속 들리는 카세트처럼 목소리가 얼굴에서 빙글빙글 맴돈다. 마르코는 띵 해져 흐려지는 시야를 겨우 붙잡았다. 제가 남자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있는 사진이 담긴 폴라로이드 밑에 쓰여 있는 [M♡J]라는 글자가 사랑하는 사이임을 알려주었다. 사진은 무수히 많았다. 그의 독단적인 사진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했고, 그다음은 함께 찍은 사진, 마지막으론 마르코 자신이 혼자 담긴 사진이 있었다. 아무래도 카메라를 든 사람은 주로 저였던 것 같고, 피사체는 그 남자, 쟝이었던 것 같았다. 송두리째 지워진 기억의 조각을 마주한 마르코는 속이 울렁거렸다. 식도가 다 찰 때까지 음식을 구겨 넣고 100m 달리기를 전속력으로 완주한 기분이었다. 우욱…. 결국 토기가 올라온다.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알아서는 안 됐을, 판도라의 상자를 연 기분이었다. 비디오가 역으로 재생된다. 잘못된 자리에 앉아 삐질삐질 땀을 흘리는 저와 그런 저를 가까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그가 보인다. 그가 건네는 이온 음료가 보인다. 우연히 많이 사서요. 첫 마디가 의심스러웠다. 이 사람은 나를 알고 있었겠지.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나를 몰랐을 리가 없을 건데. [나중에 밥이나 같이 먹자. 그럼.] 급기야 아무 감정도 없는 텍스트에서 뻔뻔함이 묻어나온다.

 

“마르코! 지금이 몇 신데 아직 그러고 있어.”

“으음…. 네, 금방 잘게요!”

 

끓어오르는 울화통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은 이번에도 마르코의 엄마 셀리 보트였다. 방에서 마셨던 커피잔을 내놓으려고 나왔다가 늦은 시각까지 켜진 작업실의 불을 보고 한소리를 지른 게 분명했다. 마르코는 찜찜하고 급기야 화까지 나는 기분을 상자 안에 모두 담아 구석에 밀어 넣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을 등지고 돌아누워 잠을 청했다.

 

아침은 생각보다 평화롭게 맞이했다. 이상한 꿈도 꾸지 않았다. 오전 8시 반쯤에 항상 울리는 알람을 단번에 끄고, 밖에서 솔솔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음식 냄새에 마르코는 일어나자마자 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에 앉기 전 찬장에서 컵을 꺼내 정수기로 물을 받았다. 차가운 쪽에 더 가까운 미지근한 물이 목구멍을 적셨다. 마르코는 컵을 가지고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 1인용 식사를 깔끔하게 끝낸 마르코는 접시를 물에 담그고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대로 다시 잠이 든 마르코는 이번에는 익숙한, 그러나 처음 오는 놀이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손에 들려 있는 이온 음료. 목에 건 카메라. 열심히 매만져 위로 정갈하게 올린 머리를 꾹 누른 인조모로 된 강아지 머리띠. 마르코! 아. 또 그 목소리다. 쟝…. 꿈속의 남자는 양 손에 콘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다. 바닐라와 초콜릿 맛이 정갈하게 섞인 맛 하나, 바닐라 맛 하나. 자신은 익숙하게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땀 엄청나게 흘리네. 괜찮아? 그의 손이 느릿하게 이마께로 향하는 게 시선에 들어온다. 속눈썹이 위아래로 흔들리고, 바람이 느릿하게 연한 갈색 머리카락을 건드린다.

 

“마르코!”

“헉…!”

“너, 어디 아프니? 응? 왜 이리 땀을 흘려.”

“아니…. 괜찮아요. 어디 나가세요?”

 

이번에 꿈에서 꺼내 준 사람은, 마르코의 아빠였다. 끙끙 앓는 둘째 자식이 걱정되어 한껏 좁혀진 미간에 마르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목도리까지 두른 아빠는 운영하는 학원의 방학 특강이 오늘부터 시작이라는 말을 하고, 그렇게 집에만 있지 말고 밖에 산책이라도 다녀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현관 앞까지 아빠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끝까지 아프면 꼭 병원에 가렴. 라고 하신 후에야 현관에서 모습을 감춘 아빠는 강사의 재질이 충분했다. 아마도 학원에서 강의 전 목소리를 저를 통해서 푼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실에서 현관까지 가는 그 1분 사이에 많은 말을 쏟아냈다.

 

마르코는 휑하니 고요한 집안 소음에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아빠 말대로 산책이나 다녀와야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일전에 자취방에서 입고 내려온 갈색 코트를 걸친 마르코는 핸드폰과 카드 하나만을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겨울과 봄 사이는 서로 경쟁자처럼 따뜻한데 차가웠다. 산책로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작은 공원으로 간 마르코는 가만히 그 풍경을 바라봤다. 일정한 간격으로 띄워져 설치된 의자들과, 앙상하지만 조금씩 싹이 나고 있는 푸른 잎들, 민둥하니 벌거벗은 잔디밭, 그 앞에는 [들어가지 마시오] 팻말을 매달아 놓은 울타리. 모든 게 어린 기억 속과 같은 모습이었다. 마르코는 그 전부터 계속 주머니에 놔뒀던 담배 케이스를 매만졌다. 딱히 담배를 찾아서 피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갑자기 담배가 끌렸기 때문이었다.

 

마르코는 공원 안쪽 구석 공용화장실 근처에 있는 흡연 구역으로 갔다. 담배 케이스를 꺼내 잘 빼어진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익숙하게 켜 불을 붙였다. 맑고 추운 하늘에 뿌옇고 뜨거운 연기가 침범한다. 마르코는 완벽히 모든 게 잘 짜인 문단 같은 풍경 안에서 뿌연 연기와 그 연기를 만들어내는 자신이 오탈자 같았다. 어제부터 울렁이던 감각이 담배를 통해 그나마 밖으로 쏟아버린 것 같았다. 딱히 집에 돌아가도 무언가 손에 잡힐 일이 없다고 생각한 마르코는 그대로 벤치에 앉았다. 고쳐진 오탈자는 다시 완벽한 문단이 되었다.

 

“어라?”

 

지겨우리만큼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마르코는 고개를 돌렸다. 딱 달라붙는 검은색 레깅스에, 얇은 스포츠형 반바지, 바람막이 재질의 겉옷을 입고 제 집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런닝화와 똑같은 흰색 런닝화를 신은 남자, 쟝이었다. 인적 드문 공원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희박한 확률이 맞닿아 떨어진 게 좋았는지 마르코를 발견한 그가 씨익 웃었다. 겨우 뱉어낸 울렁이는 감각이 돌아온다. 웃는 낯짝이 뻔뻔스럽게 느껴진 마르코는 미간을 구겼다.

 

“이런 곳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데. 혹시 우리 운명? 뭐, 그런 거?”

“그게 무슨….”

“그나저나 형 담배 피웠었나? 냄새가 하나도 안 나서 몰랐네.”

 

말을 끝맺기도 전에 속사포로 들어오는 질문 공세에 마르코는 머리가 띵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가오는 그가 불쾌하다. 마르코는 대놓고 한숨을 푹 쉬었다. 쫑알쫑알 움직이던 입술이 멈췄다. 아차, 싶은 마르코는 그제야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대각선으로 올려 그를 쳐다봤다. 민망한 표정, 이유야 어찌 되었든 제가 실례를 한 건 분명했다. 마르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그런 마르코의 행동에 그가 손사래를 친다. 마르코는 괜찮다며 제 팔을 잡아 오던 손을 자기도 모르게 쳐냈다. 짜악. 꽤 큰 소리 이후로 적막이 흘렀다.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자신이 짜증이 났다. 손바닥이 불긋했다.

 

“…미안.”

 

이번에는 미안하다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마르코가 무어라 말을 답하기도 전에 그는 등을 돌려 빠르게 공원에서 벗어났다. 하아…. 벌게진 손끝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마르코는 울 듯 미묘한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머리를 휘휘 저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딱 그 꼴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마르코는 코트를 다시 걸어두고 침대에 아무렇게 던져놨던 노트북을 가지고 책상에 앉았다. 「당신을…….」 몇 달째 깜빡이는 마지막 단어에 쉽사리 손을 가져다 대기가 어려웠다. 괜히 조바심이 났다. 뭐라도 써 내려가야 할 것 같은데 당최 떠오르는 문장이 없었다. 너 이러다 그냥 묻힌다니까! 출판사에서 일하던 대학 선배의 목소리가 흰 여백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화려한 데뷔작, 그 이후로 별다른 반응을 얻어내기 어려웠던 후속작들. 그게 마르코의 현재 위치였다. 어찌 보면 조바심이 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마르코는 마침표의 뒤로 몇 자를 적다가 다시 지웠다. 답답한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사랑은 여전히 어려웠다. 글이나, 현실에서도. 얄팍한 기억에 덧대어 써 내려간 글은 감정의 깊이가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하던 스릴러나 추리물이나 쓸 것을 왜 되지도 않는 로맨스에 도전하냐는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그럴 걸 그랬나. 마르코는 노트북 화면을 빤히 쳐다봤다. 이제 와 플롯을 뒤엎기는 무리였다.

 

마르코는 일과에 산책을 더 했다. 갑갑한 작업실을 벗어나 본가에 오면 조금이라도 숨통이 트일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그냥 쇠창살이 박힌 감방에서 창문이 딸린 감방으로 옮겨왔을 뿐 달라진 게 없었다. 똑같았다. 별 소득 없는 생활과 이어지지 않는 흩어진 문장. 주워 담을 수 없는 능력. 마르코는 현관에 앉아 잘 묶은 신발 끈을 바라봤다. 처음엔 잘 묶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헤지고 풀어진 것이 꼭 제 처지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차가움보다 따뜻함이 더 해진 날씨가 산책하기 꼭 알맞은 날씨였다.

 

그 이후로 마르코는 종종 산책할 때 그 공원을 들렀다. 하지만 그를 볼 수 없었다. 작지 않지만 크지도 않은 동네에서 또 한 번 마주칠 일이 다시 일어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마르코가 다시 그를 만난 건, 3주 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한 카페에서였다.

 

“어서 오세 ㅇ….”

 

계산대의 남자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입을 멈췄다. 마르코는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덩달아 그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부모님이 아파서 밴드를 쉬고 대신 카페를 운영한다는 곳이 여기였었나. 생각보다 아담한 가게가 그와 퍽, 어울린다고 생각한 마르코는 왼쪽 구석 창가 바로 옆 테이블에 가져온 가방을 놓고 캐셔 앞으로 다가갔다. 아메리카노 2500원. 아이스는 3000원. 적당히 싼 가격에 마르코는 메뉴판에서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홱, 고개를 숙인다. 이 반응의 원인은 저였다. 마르코는 핸드폰 뒤에 끼워놓은 카드를 꺼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아메리카노. 핫으로 주세요.”

“이천 오백 원입니다.”

“…여기에서 일하는 줄 몰랐는데.”

“자리에 앉아계시면 가져다드릴게요.”

 

물어본 질문의 대답은 동문서답이었다. 뻘쭘해진 마르코는 카드를 다시 받아 자리에 가서 앉았다. 한적한 골목 중간에 있는 작은 카페. 직원은 아마 그 한 명이리라. 마르코는 짐작했다. 가져온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책을 세 장쯤 넘겼을 때 책 너머로 팔을 감싼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달칵. 하얀 찻잔에 담긴 검은색 커피가 향긋한 향을 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커피를 놓자마자 돌아선 그의 뒤통수를 눈에 담은 마르코는 커피를 한 모금 깔짝였다. 산미도 탄 맛도 안 나는 커피. 딱 마르코의 취향이었다. 마르코는 그렇게 책을 몇 장 더 읽었다. 자료조사를 위해 동네의 작은 도서관에서 아무거나 집어 빌려온 로맨스 책 치고는 꽤 괜찮은 책이었다.

 

“어서 오세요.”

 

카페도 나쁘지 않았다. 회전율이 좋은 건지 객석에는 사람이 많이 없어 소음이 덜했고, 포장하러 오는 손님들이 이따금 문에서 딸랑이는 소리만 냈을 뿐, 기본적으로 조용하고 고요한 카페였다. 그 카페에서 단 하나, 신경이 쏠리는 사람. 계산대에 있는 쟝 키르슈타인. 그 외에는 딱 좋은 상황이었다. 흘끔흘끔 쳐다보는 시선이 영 거슬린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오물거리다, 이내 하지도 못하고 휙 하는 뒷모습이 안절부절못하는 새끼고양이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마르코는 읽던 책에 개인용 책갈피를 끼우고, 책을 덮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나가면 될 것을 나는 왜 굳이.

 

“일…. 몇 시에 끝나?”

 

하고 물어봤을까. 마르코는 가게가 있는 골목 끝에서 끄응, 골머리를 앓았다. 곧 끝나요. 하며 귀 끝이 붉어진 모습이 새로워서 그랬나, 마르코는 더는 짜증 나는 감정이나, 욱하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마르코는 그저….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대화하지 않고는 모르니까.

 

“미안, 빨리 갈아입으려고 했는데….”

“괜찮아. 쟝 밥 먹었어? 저번에 밥 먹자고 했잖아.”

“아니, 어…. 근데….”

 

음? 마르코는 제 앞에서 곤란하다는 듯이 구레나룻 근처를 긁는 남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머뭇거리던 남자의 입에서는 꽤 대담한 말이 나왔다.

 

“형은 나 싫어하잖아.”

 

마르코는 턱, 할 말이 막혔다. 딱히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싫은…. 싫어했나? 마르코는 그간 제 행동을 돌아봤다. 사진 더미가 있는 상자까지 기억이 닿는다. 자동으로 미간이 팍 구겨졌다. 딱히 이성적인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남자 앞에 서면 왜 자꾸 더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되는지, 마르코는 검지로 미간을 꾹 눌렀다.

 

“그게…. 나는 쟝이 장난에 놀아난 것 같아서. 지금 생각해보니 싫지는 않아 쟝이.”

“장…난?”

“애초에 나 알고 있었잖아?”

“내가 형을? 왜?”

“뭐?”

“응?”

 

같은 말인데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전혀 금시초문이라는 듯 구는 행동이 거짓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진 속의 사람은 틀림없이 제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올려다보는 남자가 분명한데. 마르코는 다시 구겨지려고 노력하는 미간을 힘을 주어 밀어냈다. 나 몰라? 이게 무슨 싸구려 술집에서 구애를 거는 싸구려 남자의 대사란 말인가. 마르코의 말에 이번에는 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알지?

 

“아니! 그러니까…. 우리 기차에서 만났을 때, 그 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나를.”

“무슨 말이야? 기차에서 우리 처음 봤잖아. 형이 자리 잘못 앉아서.”

“그럼 그 사진들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사진?”

 

계속 엇나간다. 마르코는 기어코 소리를 꽥 지르고 말았다. 마르코의 고함에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괜한 사람을 붙들고 제 의견만 퍼붓는 것 같았다. 이럴 거면 강사를 하지 그랬냐 마르코. 마르코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렇게 말로 전하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낫겠지.

 

 

*

“실례합니다…?”

“어차피 오늘내일 아무도 없어.”

“어. 음. 아…. 그렇구나….”

“이상한 짓 하지 않아. 걱정하지 마.”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마르코는 그가 신발을 벗은 걸 보자마자 곧장 창고로 쓰던 방으로 향했다. 청소하다 말아서 먼지가 좀 심해요. 벽을 더듬어 방의 불을 켰다. 그는 수많은 상자 사이를 둘러봤다. 마르코는 구석으로 밀어놨던 천으로 된 상자를 손잡이를 잡아 주욱 끌었다. 양 손잡이를 잡고 들어 올려 쌓아진 상자 위에 턱, 올려놨다. 그 영향으로 상자에 묻었던 먼지들이 나풀거리며 재채기를 유발했다. 에취! 그가 민망한 듯이 코를 쓸었다. 마르코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 무수히 많은 사진. 주인공은 마르코와, 쟝.

 

사진을 하나 들어 올리는 손이 마르코도 볼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떨린다. 확장된 동공이 천천히 사진 속 인물을 읽어나갔다. 저를 쳐다보는 눈에 마르코는 고개를 까딱였다. 좀 더 다른 사진들을 보라는 신호였다. 그는 처음 들었던 사진을 내려놓고 다른 사진 몇 개를 더 자신의 눈에 담았다.

 

“이게 뭐, 뭐야?”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않을까?”

“그렇지만 난, 형을 기차에서 처음 봤다고…. 진짜라니 ㄲ, 앗!”

 

떨렸던 손이 기어코 사고를 낸다. 상자를 잡던 그의 손이 미끄러져 사진이 쏟아진다. 유리 파편처럼 흐트러진 사진들 위로 툭, 무거운 소리를 내며 사진이 아닌 다른 것이 떨어졌다. [MARCO] 검은색 유성펜으로 굵게 적혀진 CD 케이스였다. 마르코는 케이스를 주워 앞뒤로 살펴봤다. 다른 설명은 하나도 없이 제 이름만 달랑 쓰여 있었다. CD를 본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이거…. 비슷한 거 나도 있는데.”

 

알 수 없는 흔적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진다. 마지막 조각이 그의 가방에서 나온다. [J] 단순한 글자 하나. 마르코와 같은 CD. 서로를 바라봤다. 그가 꿀꺽, 침을 삼켰다.

 

“책상 서랍 뒤에 있더라고. 집에서는 볼 수 있는 마땅한 장치가 없어서 피시방이나 들러 보려고 들고 다녔어.”

“으응….”

“못 믿는 눈치네.”

“그냥 이 상황이 안 믿길 뿐이야.”

 

마르코는 장을 비켜 작업실에서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는 노트북과 CD 전용 외장 하드를 들고 돌아왔다. 같이 틀어보자. 마르코는 흐트러진 사진들을 발로 대충 치웠다. 욱씬. 마르코의 발에 걸리는 사진에 그는 가슴께가 답답해져 왔다. 방에 있는 낡은 컴퓨터 옆에 노트북을 뒀다. 윙. 꽤나 큰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본체는 1분이 돼서야 모니터에 빛을 연결했다. 마르코는 방에 있는 컴퓨터에는 그의 CD를 넣고, 노트북엔 자신의 CD를 넣었다. 같은 시간, 같은 날짜에 찍은 꽤 긴 시간의 동영상만이 들어있었다. 딸깍. 딸깍. 서로의 동영상을 틀었다. 상영되지 못한 독립적인 영화가 틀어지는 순간이었다.

 

「내 이름은 마르코 보트.」

「……쟝 키르슈타인.」

 

앳된 과거의 자신이 영상 속에 있다. 서로 다른 교복을 입었지만, 한순간에 학생인 건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부터 나는….

 

「쟝 키르슈타인에 대해.」

「마르코 보트를」

「기억에서….」

「내게서….」

 

지울 거예요.

 

 

말을 끝으로 기억의 문장들이 단락으로 이어진다. 뜨개질같이 하나 둘 짜여진 단락들이 모여 글이 된다. 그 중에 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남에게든, 서로에게든 여기저기 할퀴어지고, 뜯겨지고, 부셔지고, 억눌려진 과거들. 기억과 사랑의 부재. 가슴에 응어리가 진다. 가슴께를 퍽퍽 쳐봐도 풀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토해내는 것조차 할 수 없다. 그렇게 마르코와 쟝은 어딘가에 의해 차이고 굴려진 기억 상자의 테이프를 뜯었다. 뜨문뜨문, 꿈에서 나타나는 장면이 꿈이 아니었다, 마르코는 쉽사리 진실에 응할 수 없었다.

 

흘긋, 마르코는 눈동자를 굴려 옆에 앉아있는 그를 바라봤다. 그는 그저 긴 속눈썹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동영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긴 시간이 흐른다. 노을 빛지던 하늘이 어둠에 먹힌다. 어둠을 밝히는 달이 떠오른다, 덩달아 별도 떠오른다. 그렇게 기억들도 차츰, 떠올랐다. 자연의 순리처럼.

 

동영상의 마지막은, 까만 화면이었다. 다시 감기를 뜻하는 화살표만이 화면에 비친다. 머리가 새하얗다. 걸음마도 모르는 아기처럼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화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속한 적막을 바깥에서 들어오는 까마귀 소리가 침범한다. 까악…. 까악…. 얼마 지나지 않아 뚝 끊기는 새소리가 다시 적막을 끌어냈다.

 

“거짓말….”

 

그가 중얼거렸다. 초점 없는 동공이 그가 받은 충격을 그대로 나타낸다. 잊고 살았던 사실을 다시 끄집어낸다고 한들,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마치 SF 영화를 봐도, 영화관을 나오면 다 먹은 팝콘을 버리는 현실의 쓰레기통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처럼.

 

“나, 나, 나 이제 집에 가볼게.”

 

더듬거리는 그가 허둥지둥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가방을 들었다. 마르코는 여전히 컴퓨터 앞,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방을 나서기 전, 마르코를 흘끔, 다시 뒤를 돌아 쳐다봤다. 마르코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입을 꽉 깨물고 자리를 벗어났다. 후두두. 까마귀가 울면 비가 온다고 했었나…. 누군가 알려준 신빙성 없는 가설이 들어맞는다. 빗소리가 거셌다.

 

자리에서 나온 그는 주변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를 맞으며 걸었다. 어느 쪽으로 가는 지도 모르고 계속, 계속. 걸었다. 누군가의 어깨에 치이기도 하고, 싫은 소리를 듣기도 하고, 신호등을 보지 않아 차의 성난 빵빵! 클락션 소리도 받았다. 그가 도착한 곳은 일전의 작은 공원이었다. 후두둑. 비가 나뭇잎 미끄럼틀을 신나게 타고 있었다. 우리 뭐, 그런 건가? 운명? 신난 듯 말했던 자신의 모습이 우습다.

 

“운명은 무슨 제기랄….”

 

그는 공원 입구 앞에 무릎을 숙이고 앉아 팔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축축한 천이 까슬까슬했다. 기차에서부터 줄곧 느껴져 왔던 감정. 알 수 없는 두근거림. 친근한 느낌. 이게 다 새로운 게 아니고 원래 있던… 감정. 혼란이 가중된다. 어떤 기억이 정말인지 알 수 없었다. 몸 위를 두드리던 거센 빗방울이 멈춘다. 비가 그쳤나. 싶은데, 그는 머리통 위에 느껴지는 인기척이 단번에 마르코라는 걸 알았다. 그는 자신의 품 안에 접어놨던 고개를 들어 마르코를 바라봤다.

 

겉옷을 하나 없는 몸, 짝짝이 슬리퍼, 헉헉거리는 숨, 새빨개진 발끝과 손끝 저를 바라보는 눈빛. 꽤 급하게 나온 몰골이었다. 축축하니 다 젖은 제 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쟝. 마르코는 힘겹게 그를 부르고 숨을 들이쉬었다. 쉼 없이 달린 탓에 숨이 모자랐다. 그래도 안에 있는 모든 숨을 다 토해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다시 해보자.”

“뭐? 설마 지금 다시 사랑해보자는 거야?”

“…….”

 

마르코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바람을 허! 하고 세게 쳤다. 어이없는 감정이 눈에 가득 담긴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빛이 기어이 이글거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감정을 고조시킬 뿐이었다.

 

“미쳤어? 그 동영상을 보더니 없던 감정이라도 생겨? 기억을 지울 만큼 서로에게 최악이었던 거야! 돌아갈 수 없어!”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그의 성난 등판이 크게 오르내렸다. 그게 아니야. 마르코는 그에게 맞춰 무릎을 접었다. 눈높이가 맞춰진다.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눈빛이 전해진다. 그의 마음속으로.

 

“화내지 말고 들어줘. 쟝. 우리는 약한 사람이었던 거야. 사랑 앞에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두려움을 느낀 거겠지. 기억을 지운 게 아니야. 그냥 잊었던 거야. 나는 종종…. 쟝의 꿈을 꿨어.”

“…….”

“우리 아직 제대로 얘기도 못 해봤잖아.”

“…….”

 

굵은 빗소리가 목소리에 파묻힌다. 들썩거리던 등이 어느새 잠잠히 멈춰있었다. 그는 마르코가 하는 말을 단단히 담았다. 차가운 손이 차가운 손을 맞잡았다. 서로의 온기가 전해진다. 마르코는 잡은 그의 손에 촉, 입을 맞췄다. 그리고 확신에 찬 목소리. 우리 정말로, 다시 할 수 있어.

 

“약속할게.”

 

이번에는 널 제대로 사랑할게.

*

 

 

연속적으로 비가 오더니, 봄이 오는 소식이었나, 어느새 봄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마르코는 부쩍 밖으로 나가는 일이 많아졌다. 데뷔작보다 팡 터트린 신작 때문에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았냐는 출판사 대학 선배의 입은 귀에 걸렸다. 아마 마르코의 신작 때문에 출판사가 대박이 난 듯 보였다.

 

머리를 왁스로 정갈하게 쓸어 올린 마르코는 얇은 검은색 목티에 정장 바지를 입고 광을 낸 구두를 신고 신발장 옆에 딸린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이것저것 점검하며 약지에 반지까지 빼먹은 것이 없나 거울을 한참 본 후에야 현관문을 나섰다. 잡지에 실릴 인터뷰를 하러 기차에 몸을 실었다. 마르코는 적힌 자리를 단번에 찾아갔다. 분명 제 자리가 맞는데 자리는 이미 주인이 있었다.

 

“저기요.”

“네?”

“그쪽 제 자리 아닌가요?”

“전 창가 자리가 더 좋아서요.”

“그렇담, 어쩔 수 없죠. 뭐.”

 

우유를 한 숟가락 탄 부드러운 갈색 머리가 마르코의 어깨에 닿는다. 온전한 기억을 실은 열차가 덜커덩,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창가 쪽에 앉은 남자의 손에 약지에 반지가 끼워진 손이 덮어진다. 밑에 가라앉은 손이 별안간 뒤집히더니, 반지를 낀 손 사이사이로 손가락이 침범했다. 서로 놓치기 싫어 꽉 힘을 주어 잡았다.

 

“아. 음료수를 실수로 많이 사서요. 이거 드실래요?”

 

마르코의 앞으로 특이한 맛의 음료수가 쑥, 내밀어진다. 영광이네요. 마르코는 음료수를 받아 앞에 있는 컵받이에 꽂았다. 기차가 마지막 역에 다다른다. 스피커에서 노래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 역은 종착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오늘도 함께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예쁜 하루 보내세요. 안녕히 가십시오.

Schick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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