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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W. 냠동

* 네임버스 세계관

 

* 글 내에 비속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 어려서부터 짝이 지정되며 그 상대의 이름은 신체의 어딘가에 각인된다. 각인의 발현은 유년기 시절의 생일, 늦는다면 청소년기. 그리고 글자가 뜨지 않아 반 평생을 노 네임이라 믿고 온 마르코는 18번째 생일에 자신의 오른쪽 팔목을 보고 조용히 그 자리에 밴드를 붙였다.

 

 

 

 

 

 

 

쟝 키르슈타인. 정직하게 적힌 여섯글자. 평생을 함께 지내며 남 몰래 키워진 마음을 부정하고 외면하려 했다. 그런데, 그런데 이런 운명의 장난은 마르코에게 골치만 아팠다. 쟝 또한 마르코처럼 유년기에 이름이 각인되지 않아 둘 다 어렸을 시절 아쉬워했던 쟝을 마르코가 자주 달래주곤 했었다. 그래 그랬었지... 혼자서 한참을 곱씹다가 쟝은 조용히 핸드폰의 전화번호 키패드 1을 꾹 눌렀다. 두 세 번 이어 지는 수신음 끝에는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어 마르코~! 지금 막 전화 걸려고 했는데. 생일 축하해.

 

- 그래 고마워ㅎㅎ. 근데 쟝... 나 한 가지 물어볼 거 있는데.

 

- 응? 뭔데.

 

- 너 진짜 어릴 때 이름 각인. 안된 거 맞아?

 

- 아직 안됐다는 거 알고 있잖아. 너... 혹시 이름이라도 뜬 거냐? ㅋㅋㅋㅋ

 

 

 

 

 

눈치 하나는 이상하게 빨라서... 마르코는 금방 얼버무리고 쟝과의 통화를 종료했다. 머리 아프다... 각인을 지울 순 없나? 되겠어 그게.....마르코는 끝없는 고뇌를 되풀이하다 결국엔 관두었다. 그리고 나온 한 가지 결론.

 

죽을 때까지 각인된 이름은 나 자신만 알고 있자.

 

 

 

 

 

 

 

 

 

 

 

어릴 때부터 서로 알고 지냈었다. 못볼 꼴 다 보면서 쭉 함께했었다. 마르코가 기억하는 모든 어린 시절과 추억들에는 항상 쟝이 자신의 옆에 같이 있었다. 언제부터 좋아했더라... 여름철에 같이 바다에 갔을 때? 아니면 함께 첫눈을 봤을 때? 좀 더 오래전인 거 같은데...... 한번 시작한 물음표는 끝이 없었다.

 

모순적이다.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이 각인 되었어도 이상하게 불안하고 조마조마하다. 쟝에게는 꼭 좋은 친구로 남고 싶었는데. 그저 좋은 친구로 쟝 과의 관계에 선을 그으려 했어도, 의지와 마음은 전혀 정반대로 놀았다. 손목에 쟝의 이름이 보였을 때도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혼자만의 긴 침묵끝에 마르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근본적인 이유가 제일 걸림돌이 된다. 쟝이랑 나는... 둘 다 남자잖아.

 

 

 

 

 

 

 

 

 

 

 

2.

 

사샤. 요즘 마르코 되게 이상한 거 알지. 네? 뭐 비슷하던데요. 아니야... 다르다니까? 확실하다. 마르코가 묘하게 달라졌다. 줄곧 몇 년 동안 같이 해왔던 등하교도 이젠 몇분씩 먼저 가고 대화나 문자를 해도 뭐랄까... 점점 거리를 둔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한테 태도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이상하게 나한테만. 뭘 잘못했나? 그리고 수상한 거 한 가지 더. 오른쪽 손목에 붙어있는 밴드. 며칠째 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숨기는 마냥 철저하게 감추고 애꿎은 피크닉 빨대만 잘근잘근 씹던 쟝은 복도 저 건너편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마르코와 조우했다.

 

 

 

 

 

- 야 마르코!

 

- 어, 어 쟝 안녕 ㅎㅎ

 

- 뭐야 요즘... 너 되게 이상한 거 아냐? 요즘 계속 말,

 

- 지금 어디 가야 해서... 좀 이따 다시 얘기할까?

 

 

 

 

 

아... 어 그래. 쟝은 멋쩍듯이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확실하다. 마르코는 지금 나를 분명히 피하고 있다.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외면하며 거리감을 둔다. 바보 같아... 멍청한 마르코. 어릴 때는 불만이 있었으면 얼굴을 붉히면서라도 잘만 말했으면서, 느지막이 사춘기라도 온 건가. 아니면... 설마 이름이라도 각인된 건가? 마르코의 오른쪽 손목에 붙여진 밴드가 쟝의 뇌리를 스쳤다. 그거... 언제부터 붙였었더라.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마르코 이름이 새겨졌구나.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이름을 왜 가리지? 보통은 상대 찾겠다고 드러내거나 요란하게 소문내는 경우가 많잖아. 근데 마르코는 오히려 계속해서 밴드가 붙여진 손목을 숨기던데. 지난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상처가 얼마나 심하길래 아직 붙이고 있냐 물어보면서 별 의도 없이 밴드 위를 만지작거리더니 마르코 답지않게 예민하게... 굴었다고 해야 할까. 오랜 시간 붙어있었는데도 마르코 그렇게 제법 화난 목소리로 얼굴을 붉힌 것은 처음 이였다. 본인도 당황했는지 곧바로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긴 했지만. 몇 년을 허울없이 지냈는데 이제 와서 선을 긋는다고? 당연히 속상하다. 마르코가 화를 내서가 아니라, 이상하게 거리를 두려고 하고 천천히 내쳐지는 것 같다. 그리고... 그리고 정말 이름이 새겨지고, 그 상대를 만난다면. 나에게 웃으면서 그 상대를 소개해준다면.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인데, 이상하게 가슴이 아린다. 어차피 있을 일일 텐데 이상하게 그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 쟝, 우두커니 서서 뭐해요? 이제 수업 시작하는데.

 

- 어? 어어 아니야 아무것도.

 

 

 

 

 

 

 

 

 

아무래도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지. 쟝은 쭉 씹고 있던 빨대와 피크닉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3.

 

[속보] 동성간 서로의 이름 각인된 사례 증가... 다분한 의견 속출

 

 

 

그게 뭐 별거라고. 마르코는 기사가 담긴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이젠 쟝도 슬슬 눈치를 채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언제까지나 숨길 수 없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드러난다는 뻔한 결과가 와도, 최대한 쟝에게 감출 수 있을 때까지 감추고 싶다. 동성간의 연애. 예전에 비해서는 확실히 보편화하였고 점점 용기를 내어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치만 모두가 긍정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꺼림직해하면서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비례된다. 쟝은... 어떨까. 걱정부터 시작하는 모습이 우습다. 설령 모든 것을 털어 놓는다고 해도, 그 뒤에는? 나를 역겹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더럽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몇번을 마음을 고쳐먹어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말 한마디에 내가 기억하는 모든 추억에 함께 공존하던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저 '좋은 친구'로 남으려고 하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

 

연거푸 깊은 한숨을 내쉰 마르코는 눈을 감고 마른세수를 하다 두 손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휴대폰의 진동소리에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 마르코. 너 잠깐 나좀 보자. ]

 

[ 바쁘다는 변명하지말고 지금 나와 ]

 

[ 안바쁜거 알아 ]

 

[ 니 집앞이야 ]

 

[ 할말있어. ]

 

 

 

 

 

 

 

 

 

 

 

4.

 

7월 초의 여름은 더웠다. 아파트 입구에서 손부채질을 하며 문자를 보낸 쟝은 할말이있다는 텍스트를 보내고 핸드폰을 껐다. 답답한 범생이... 물론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하다. 문자 몇 개 보내는 게 뭐 그리 떨린다고 심호흡만 여러 번 하다가 보냈는지. 근데... 뭐라고 해야 하지? 손목 좀 걷어보라고? 밴드 좀 때보라고? 멍청하게 무작정 연락만 하고 뒷감당할 생각을 못했다.

 

 

 

 

 

 

 

- 쟝.

 

 

 

 

 

기척도 없이 어느새 제 옆에 있는 마르코를 발견하고 쟝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 ㅋㅋㅋㅋ 뭐야 그 과민반응은.

 

- 아니... 너 나 좀 봐봐.

 

 

 

 

 

 

 

쟝은 마르코의 볼을 두손으로 붙잡았다. 쟝은 숨을 깊게 들이 마셨다. 너 무슨 일 있지 라고 간단명료하게만 말해야지. 더도 덜도 말고, 무슨 일 있냐고만 물어봐야한다며 깊게 다짐하고 쟝은 숨을 내쉼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 마르코 너 네임 생겼지.

 

 

 

 

 

 

 

씨발 이게 아니였는데....?

 

 

 

 

 

 

 

 

 

5.

 

둘 사이에는 긴 정적만이 흘렀다. 아 진짜 망했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려고 한건 아니었는데 어떡하지???? 그럴일 없다면서 웃어넘겨야 하나??? 쟝은 조심스레 마르코의 표정을 살폈다. 마르코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당황한 것 같기도 한데, 어쩌면 당혹스러워한다는 게 더 걸맞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면에서는 모든 걸 다 포기한, 체념한 사람의 표정과도 보였다.

 

 

 

 

 

 

 

 

 

- 아ㅋㅋㅋㅋ 역시 그럴 일 없지? 그냥 해본 말이였어 요즘 네가 도통,

 

- 맞아.

 

 

 

 

 

 

 

쟝은 횡설수설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다 얼어붙었다. 지금 내가 잘 못 들었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든다. 진짜... 였네.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이상하다. 나는 마르코에게 있어서 그저 친한 친구일 텐데, 여러 가지 감정들이 요동치고 속이 울렁거린다. 애초에 왜 나는 마르코가 네임이 생겼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리고 이런 상황이 오는 것을 부정하고 오지 않기를 바랬던걸까. 나는 왜... 마르코와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속상해하는 걸까.

 

 

 

 

 

 

 

 

 

- ...진짜로?

 

- 진짜로.

 

 

 

 

 

코 끝에서부터 찡한 느낌이 든다. 입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분명히 축하해야한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누구냐고 장난스럽게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며 말을 해야 하는데. 바보같이 입을 열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 누군지... 안 물어볼 거야?

 

- ...그래 누군데. 밴드나 뜯어보자 이름 어차피 거기에 쭉 새겨져 있던 거잖아.

 

- 잠깐,

 

 

 

 

 

 

 

 

 

순식간이었다. 쟝이 마르코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도, 팔목을 붙잡고 가지런히 붙여져 있는 밴드를 뜯는 것도, 쟝이 팔목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 "쟝 키르슈타인"을 본 것도, 그리고 쟝의 눈물이 쏙 들어간 것도.

 

 

 

 

 

 

 

 

 

6.

 

 

 

 

 

 

 

- 너... 너 이거 뭐야?

 

-

 

- 이거 뭐냐고 물었잖아. 이게 뭐야... 왜 니 팔목에 내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또 다시 정적. 쟝은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오만가지 물음표가 머릿속을 채웠지만 근본적이고 제일 큰 물음표 하나. 마르코의 팔목에 왜... 내 이름이 새겨져 있지?

 

 

 

 

 

 

 

- 야 마르코, 뭐라고 말 좀 해보라고. 이게...이게 뭐야?

 

- ...좋아했었어.

 

-뭐라고?

 

- 오래전부터, 진짜 언젠지도 모를 만큼 널 좋아했었다고. 진짜 너무너무 좋아서 하루에 몇번씩이나 네 얼굴이 생각나고 너랑 같이 있고 싶었어. 하루종일. 쟝... 나는, 나는 너한테 좋은 친구로는 못 남겠어. 내가... 너를 너무 많이 좋아하나 봐 내가 생각 했던 것 그 이상으로. 더럽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니까. 몇 년을 함께해온 친구가 몇 년 동안 몰래 좋아했었다는걸 알면...

 

 

 

 

 

 

 

- 너 진짜 등신이냐?

 

 

 

 

 

 

 

진짜... 진짜 바보 같다 너. 있지 마르코, 이상한 거 하나 알려줄까? 나 요즘 너만 보면 기분이 이상해. 어딘가 턱 막힌 것 처럼 먹먹하고. 네 생각만 나. 그리고 아마 네임 새겨지고 나서 부턴가? 너 나 피해 다녔잖아. 내가 그거 하나 정도 눈치 못 챌 줄 알았던 거야? 아무튼 너... 내가 얼마나... 얼마나 답답했는지도 모르지. 밴드밑에 감추던 거, 네임일 거라고는 어느 정도 예상했는데... 그게 나일 줄 몰랐네. 난 그것도 모르고 니가 나중에 그 이름상대 데려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따위 별의별 생각만 했던 거네...

 

 

 

 

 

 

 

 

 

코 끝부터 가슴까지 찌릿거린다. 이상해... 울 것만 같은데 전처럼 속상한 감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이상하게 기쁘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고 두근거린다. 마음 저 아래서부터 설레어오는 감정을 차마 무시할 순 없다. 마르코 진짜 바보 같아... 공부만 잘하고. 제 앞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얼굴에 주근깨를 따라 홍조를 띈 마르코에게 쟝은 다시 한번 물었다.

 

 

 

 

 

 

 

- 그래서 할 말은 없어?

 

-...좋아해. 그리고...

 

- 그리고?

 

- ...쟝, 우리 사귈까?

Schick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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