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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W. 베드로

*환생 AU

*마르코는 전생을 기억합니다

 

1

경찰이 되고 처음 사귄 여자 친구와 결혼한 것은 2년 전의 겨울이었다. 절절하게 좋아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결혼 상대는 좋은 사람이었다.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는 방송국이 쟝의 근무지와 가까워 데이트가 편했고 기념일마다 쟝의 일정을 무시하면서까지 만남을 종용하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줄 알았고 무엇보다 쟝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쟝에게 주는 마음을 완벽하게 돌려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쟝에게 청혼했다. 다정했다. 그렇게 다정한 상대와 만난 일 년이 싫지 않았기 때문에 쟝은 미지근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결혼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쟝은 행복하지 않았다. 아내에게는 쟝이 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사랑할 운명의 남자였지만 쟝에게 아내는 친절한 동거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은 아내보다도 쟝을 훨씬 괴롭게 했다. 우리는 운명인가 봐. 활짝 웃으며 쟝을 부둥켜안는 아내를 따라 마주안는 것은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결혼을 한 뒤 약 두 달 동안은 새벽마다 잠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 해가 뜰 때까지 줄담배를 피우곤 했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밤낮으로 함께하는 데 익숙해졌을 때쯤 비로소 이러한 청승이 줄어들었다. 결혼한 지 2년이 지나고 나니 불편한 기분이 사라졌고 자상한 남편을 연기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결혼기념일에 아내와 대화를 나누며 느지막하게 저녁을 먹는 것이 싫지 않게 되고, 엄격한 아내의 부모님 앞에서 격식을 맞추기 위해 정장을 입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고. 그렇게 손을 놓고 있어도 다가오고, 또 지나가는 순간들. 쟝은 기계적인 지금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아내의 생일이었다. 아내가 근무하는 방송국의 직원들을 초대해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며칠 전 백화점에 갔을 때 예쁘다고 한 지갑을 선물하자 고맙다며 기뻐하는 아내를 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고. 처음 보는 모습도 아니면서 직원들은 자지러지고. 아내의 사진을 배경 화면을 해 둔 걸 보고 쟝의 손에서 휴대폰을 뺏어가 놀리고. 멋쩍게 웃으며 장단을 맞추고 있던 중 쟝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앗. 저장 안 된 번호로 전화 왔는데요. 직원이 말했다.

 

"끊어도 돼요."

"아, 그렇게 함부로 끊지 말라고 했잖아. 중요한 전화면 어떻게 해. 줘. 내가 받을게."

 

귀찮은 얼굴로 끊어도 된다고 말하자 버럭 화를 낸 아내가 직원의 손에서 휴대폰을 뺏어들었다. 괜찮다니까. 쟝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내가 전화를 받아 휴대폰을 귀에 댔다. 평소 주량보다 와인을 더 마시고 취한 모양이었다. 좋은 날에 별것도 아닐 전화에 반응해 무안을 주는 건 아내에 대한 배려가 아닌 것 같았다. 상관없잖아. 그래서 엉망인 발음으로 전화를 받는 아내를 내버려두었다. 여보세요. 네. 맞는데요. 네에. 네에. 잠시만요.

 

"여보. 마르코 보트라는 사람인데."

 

그렇게 손을 놓고 있어도 다가오고, 또 지나가는 순간들.

 

"알아?"

 

지나간 운명도 돌아오고 있었다.

 

 

2

마르코가 쟝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2학년으로 복학한 것은 7월의 중순이었다. 안녕. 마르코야. 2년 전에 자퇴했고 이번에 복학했어. 차분한 목소리로 본인을 소개하는 마르코에게 쟝은 별 흥미가 없었다. 몇 달 뒤에 있을 체육 대회 준비로 후덥지근한 운동장에서 두 시간이나 축구를 한 뒤라 땀을 흘리기에만 바빴다. 축구를 잘하는 형이라면 깡마른 R 대신 체육 대회 참가를 권유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쟝은 손부채질을 거듭했다.

 

"오, 열아홉 살... 키 봐."

"자퇴 왜 했냐고 이따 물어보자."

 

반 아이들은 마르코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며 금방 시끌벅적해졌다. 고등학생에게는 두 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극대화되는 모양이었다. 쟝도 그랬다. 꼭 나이 때문이 아니어도 왜인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봐도 마르코와 쟝이 친해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굳이 친구가 되는 걸 거부할 생각은 없었지만 먼저 다가가 말을 걸 마음도 들지 않았다. 마르코에 대한 첫인상은 그랬다.

 

마르코는 쟝이 앉은 책상에서 멀지 않는 곳에 앉게 되었다. 마르코가 천천히 걸어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쟝은 턱을 괸 채 마르코에게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쟝의 짝인 S가 쟝의 몸을 팔꿈치로 치며 말했다. 야, 말 걸어 봐. 쟝은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내가 왜. 그때였다.

 

"잘 부탁해."

 

마르코가 손을 뻗어 쟝의 등을 건드리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뭐냐. 왜 말 걸어. 쟝은 속으로만 생각하며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너한테만 잘 부탁한다고 하냐. 나는? 나는? 쟝은 몸을 베베 꼬며 칭얼거리는 S의 뒤통수를 한 대 쥐어박고 말했다. 닥쳐.

 

 

3

마르코는 2년 만의 학교에 일주일도 안 되어 금방 적응했다. 생각 외로 무지 착했기 때문이다. 반 학생들이 두 살이나 더 많은 자신에게 기를 쓰고 까불어도 자비롭게 용서했다. 몇몇은 저 형이 욕하는 걸 봐야겠다며 일부러 깝죽대면서까지 마르코를 신경 쓰이게 만들기도 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마르코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데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또 마르코는 아주 잘 웃었다. 그건 마르코를 열심히 관찰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선생님이 수업 도중 마르코의 자세를 칭찬해도, 누군가 마르코에게 예의 없는 말을 해도, S가 재미 없는 장난만 수십 번을 반복해도 마르코는 웃었다. 쟝과 눈이 마주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도 순한 얼굴이었지만 웃으니 더 물러 보였다. 쟝은 그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 반 학생들이 모두 마르코와 친해질 동안 쟝은 그럴 수 없었다. 마르코는 모두에게 친절했지만 쟝에게만은 달랐다. 홀대했다는 것이 아니다. 유독 살가웠다. 쟝과 눈이 마주치면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연필이나 지우개도 모두 짝이 아닌 쟝에게 빌렸다. 황당한 사건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쟝 외의 누구도 마르코가 한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르코는 쟝의 신경만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냐. 쟝은 경악했다.

 

쟝은 마르코와 거리를 두고 싶었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마르코와는 친구로서 좋은 사이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8월이 되며 둘은 함께 음악실 청소 당번이 되었다. 앞으로 좋든 싫든 학교가 끝나면 마르코와 한 공간에서 30분 간 청소를 하고 담당 선생님께 검사를 받게 된 것이다. 마르코와 단둘인 것이 싫어 S에게 청소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지만 S는 단호하게 말했다. 꺼져.

 

그때부터 어색하게 청소를 하는 날이 반복되었다. 마르코는 청소를 하다 말고 꾸준히 쟝에게 말을 걸었지만 쟝은 마르코의 말에 제대로 된 대꾸 한 번 하지 않았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검사를 기다릴 때는 운동화 코를 바닥에 긁으며 머릿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마르코가 쟝에게 말을 걸었다가 무안한 표정을 지은 것이 벌써 몇 번째였다.

 

"쟝."

 

어느 날은 마르코가 쟝을 불렀다. 쟝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어. 그러자 마르코가 쟝의 앞으로 다가와 쟝의 턱을 잡고 끌어올렸다. 쟝은 화들짝 놀라 마르코의 손을 뿌리쳤다. 너 뭐 하냐.

 

"내가 불편해?"

 

마르코가 물었다. 속상한 듯한 얼굴이었다. 이런 표정을 지을 게 껄끄러워서 지금까지 마주 보지 않았던 건데. 쟝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안 불편한데."

"그럼 왜 자꾸 피해?"

"내가 뭘."

"눈."

 

마르코가 쟝의 볼을 양손으로 잡았다. 마르코와 쟝의 눈이 마주쳤다. 쟝은 순간 숨을 참았다. 마르코의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그렇게 몇 초 간 쟝을 바라보던 마르코가 방긋 웃었다.

 

"이제 잘 봐 줄 거지? 안 피하고."

 

대답할 수 없었다. 기분이 묘했다.

 

 

4

청소를 일찍 끝내고 마르코와 빈 교실에 앉아 담당 선생님의 검사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마침 여자 친구에게 메시지가 와 대충 답장을 하고 있었다. 가방 속의 책을 정리하던 마르코가 쟝에게 물었다. 누구랑 연락하는 거야?

 

"여자 친구."

"여자 친구가 있어?"

"어. 다음주가 100일."

"아~ 부럽다."

 

진심으로 부러워서 한 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마르코는 항상 미적지근했다. 웃고 있지 않을 때가 없는데도 그랬다. 물불 안 가리고 부정적인 감정부터 표출하는 인간들보다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마르코를 상대하는 건 가끔 어려웠다.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부러우면 너도 여자 친구 사귀면 되잖아. 너 착하고 반반하니까 안 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그거 아닌데?"

"그럼 뭔데."

"쟝이랑 사귀는 여자 친구가 부럽다고 한 거야."

"뭐라고?"

"다정하니까."

 

뭔... 개소리야. 이번에는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마르코를 바라봤다.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마르코는 항상 미적지근했다.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5

마르코의 심부름이 겹쳐 청소가 유독 늦게 끝난 날이었다. 열병이라도 걸린 건지 몸이 무거워 미적미적 청소를 하고 나니 운동장을 제외하면 학교에 학생이 몇 남지 않았을 만큼 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청소를 마치고 나면 가볍게 인사한 뒤 쟝은 정문으로, 마르코는 후문으로 하교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음악실 문을 잠그는 등짝에 대고 손을 흔들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웬일로 마르코가 쟝을 뒤따랐다.

 

"뭐냐? 왜 따라와?"

"오늘은 동생 데리고 집 가야 되거든."

"너 동생 있냐?"

"응."

 

보여 줄까? 물은 마르코가 쟝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교복 안쪽 주머니를 뒤적거려 지갑을 꺼냈다. 보관을 얼마나 잘했는지 때도 별로 묻지 않은 사진이 꽂혀 있었다. 열 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아이들이 커다란 건물 앞에 모여 찍은 사진이었다. 무리의 가장 왼쪽에는 지금보다 앳된 얼굴의 마르코가 서 있었다. 

 

"그래서 이 중에 누가 네 동생인 거냐?"

"동생은 여기 나온 애들 전부. 오늘 데리러 가는 건 얘."

"조올라 많네."

"아무래도 그렇지. 보육원에서 사니까."

 

사진을 구경하던 쟝이 고개를 들었다. 뭐? 마르코가 하하 웃었다. 내가 부모님이 두 분 다 안 계셔서. 놀랐어? 

 

"아니... 그것 때문이 아닌데. 아무한테나 말해도 되는 거냐?"

"아무한테나 말하는 거 아니야. 쟝이라서 말한 건데."

"나라서 말하는 건 또 뭐야."

"내가 쟝 좋아한다는 뜻이지."

 

또 그런 말. 인상을 찌푸리고 가방을 고쳐 맸다. 마르코는 또 혼자만 멀쩡한 꼴이었다. 마르코와 함께 걷는 길이 왜인지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왜 사람 낯간지럽게 만드는 말을 해서. 학교를 빠져나와 몇 분을 더 걸었다. 쟝은 학원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고, 마르코는 동생이 있다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창밖으로 마르코를 봤다. 사진 속에 있던 아이와 손을 잡고 있었다. 쟝은 창문을 열고 인사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친구를 사귀고 가까워지는 건 쟝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르코만은 달랐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금방 잊어버렸을 말을 마르코가 했을 때는 기분이 묘했다. 내가 쟝 좋아한다는 뜻이지. 이 말이 마르코의 웃는 얼굴과 함께 자꾸 맴돌아 학원에서도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6

- 쟝! 우리 벌써 사귄 지 100일이나 됐넴 처음 내가 너한테 사귀자고 했을 때는 받아 줄 줄도 몰랐고 이렇게 오랫동안 나랑 사귀어 줄 줄도 몰랐어 100일이나 되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나한테 잘해줘서 고마웠어 앞으로 이렇게....

쉬는 시간에 여자 친구로부터 온 장문의 메시지를 눈으로 훑는 중이었다. 맞다. 오늘이 100일이라고 했지. 저번에 예쁘다고 했던 목걸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오늘 만나기 전에 백화점을.... 머릿속에 여자 친구를 만나기 전 백화점과 제과점을 방문할 계획을 세우는 중 S가 옆자리에 앉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야, 그거 들었냐?"

"아, 씨, 귀청 떨어지겠네."

"마르코 그 형 있잖아...."

 

고아래. 보육원에서 산대. 여자 친구에게 보낼 답장을 적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인상을 찌푸리고 뒤를 돌아봤다. 마르코는 책을 읽고 있었다. 어제도 읽던 책이었다. S가 한 말을 듣지 못한 건지 무표정이었다. 책을 읽는 데 열중한 듯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뭐. 내가 소문을 낸 것도 아니고. 쟝은 S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나도 고맙다. 네가 잘해 줘서 나도 100일 동안 행복했어.

 

"오늘 아침에 반장이 교무실에서 들었대. 근데 난 약간 실망했다. 저 형 허여멀겋고 반반해서 어디 부잣집 아들인 줄 알았다. 공부도 잘한다길래 사교육 엄청 받는 줄. 근데 걍 거품이라니까 와... 충격."

 

험상궂은 얼굴로 들은 척도 하지 않는데 S는 눈치 없이 멈추지 않고 나불거렸다. 다시 마르코를 돌아봤다. 여전히 무표정했다. 몇 분 전에도 읽던 책장에 멈춰 있었다. 들었나. 못 들었나. 아니, 내가 알 바 아니니까. 마르코랑 특별한 관계도 아니고 굳이. 굳이 욱할 필요 없다. 무시하면 돼. S는 원래 지가 하는 말에 관심을 주지 않으면 혼자 토라졌다가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헛소리를 늘어놓는 새끼였다. 그러니까 뭐라고 하든 일단 참고... 내가 화낼 이유 없잖아.

 

"그래서 나 며칠 전에 저 형이랑 번호도 교환했는데 걍 삭제했어. 다른 애들도 저 형 안 내킨다고 다 지웠대. 허허실실 웃기만 하고 착한 척하면서 속으로 무슨 생각 하고 있을지 어떻게 알아? 자퇴했던 것도 돈 때문이라는 소문이...."

"그래서 어쩌라고."

"어?"

"허구한 날 물어본 적도 없는 얘기만 조잘조잘... 그래서 뭐 어쩌라고 새끼야."

 

갑자기 왜 그래. 화났냐? 당황한 표정의 S를 흘겨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르코는 놀란 얼굴로 쟝과 S쪽을 보고 있었다. 다가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전화번호 알려 줘. 마르코는 말문이 막힌 듯 조용했다. 안 되냐? 친군데. 쟝이 휴대폰을 더 들이밀자 그때서야 마르코가 웃었다. 아니, 돼.

 

마르코와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S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 왜 그러냐? 저 형이랑 뭔 사이야? 솔직히 말하면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쟝도 쟝이 왜 그렇게 했는지 몰랐다. 마르코를 욕하는 S가 재수 없었다. 한 대 때리고 싶은 걸 백 번 참았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여자 친구였다. 왜 보고도 답장이 없어. 충동적으로 메시지를 쓰고 머뭇대다 전송했다.

 

- 미안해

- 헤어지자

 

 

7

마르코와 전화번호를 교환한 뒤로 마르코와 쟝은 거의 매일 전화했다. 시작은 어쩌다 보니 쟝이 실수로 전화를 걸어 버렸는데, 마르코가 몇 초 만에 전화를 받아 버린 것이었다. 어쩌다 보니 끊지 못하고 뭐 하고 있냐는 둥 밥은 먹었냐는 둥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았고, 전화를 끊었을 때는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마르코와 전화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날이 늘어갔다. 쟝이 열심히 떠들면 마르코가 맞장구를 쳐 주는 식이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시답잖은 일로 싸운 일, 숙제를 하지 않아 학원 선생님에게 혼난 일. 그래서 몰래 문제집에 욕을 썼다가 들킨 일. 재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듣고 있기에는 심심하지 않은 이야기들.

 

영상 통화를 하는 날도 있었는데 그건 아주 가끔이었다. 통화 시간도 아주 짧았다. 보통 마르코가 먼저 말을 꺼냈다. 쟝, 오늘은 영상 통화 할까? 그럼 쟝은 허겁지겁 거울 앞으로 달려가 머리를 정리했다. 친구 사이에 후줄근한 모습을 보이면 뭐 어떻겠냐마는 쟝은 제 모습을 꼼꼼히도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

 

"오늘도 학원 다녀온 거야?"

"어. 저번에 너랑 전화한다고 숙제 못 하고 걍 잤잖아. 그거 가지고 삼 일을 쪼아대."

"저번에 말한 선생님? 그러게 내가 숙제하고 전화하자고 했잖아."

"아, 아빠도 아니고. 시끄러워."

 

며칠 전 마르코와 밤 열 시부터 새벽 세 시까지 통화한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물론 마르코가 쟝에게 숙제를 다 한 뒤에 전화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은 건 맞았다. 하지만 썩 진심은 아니었는지 쟝이 마르코의 말을 무시하고 할 말을 이어나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대화를 계속했다. 쟝이 꾸벅꾸벅 졸기 전까지 전화를 끊지 못한 바람에 숙제는커녕 연필도 들지 못했고, 결국 학원 선생님에게 호되게 혼날 수밖에 없었다.

 

"근데 마르코 너는 공부 어떻게 하냐?"

"나?"

"학원도 안 다닌다며. 궁금해서. 잘하는 건 맞냐?"

"쟝... 난 해 본 적이 없어."

"뭘."

"1등을 안 해 본 적이 없어."

"너 이 재수 없는 새끼...."

 

쟝~ 형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마르코가 신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럴 때만 형이냐. 힐난하듯 말했지만 결국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쟝이 베개를 끌어안았다. 마르코와 전화할 때면 무슨 이야기를 해도 재미있었다. 게임과 축구 등 쟝의 관심사에 대한 대화가 아니어도 그랬다.

 

"나 앞으로 깨워 줘."

"왜?"

"자꾸 알람 못 듣고 지각하니까. 네가 일곱 시 반에 전화해. 그때 가족들도 없어서 혼자 못 일어나."

"쟝 혹시 아기야?"

"귀찮으면 하지 말든가."

 

반쯤은 장난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아침부터 마르코에게 전화가 왔고 그때부터는 알람 대신 마르코의 전화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 적은 없었지만 마르코가 전화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못할 지경이었다. 아침에 듣는 마르코의 목소리는 색달랐다. 잠에 취한 쟝이 칭얼대면 쟝, 일어나야지~ 하며 달랬다. 지가 나를 아기 취급하는구만.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왜인지 즐거웠다. 미리 일어나서도 마르코에게서 전화가 올 때까지 침대를 벗어나지 않는 일도 있었다.

 

 

8

한 번은 함께 학교를 빠졌다. 마르코의 전화도 받지 못하고 늦잠을 잔 쟝의 충동적인 제안이었다. 등교 시간이 두 시간이나 지난 때에 느지막이 일어나 마르코에게 깼다는 문자를 보냈다. 수업 중이 분명한 시간이었다. 마르코가 문자를 확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할 게임을 업데이트하던 중에 휴대폰이 진동했다.

 

- 쟝 지금 일어난 거야? ㅠㅠ 나는 이미 등교했어

- 뭐냐 너? 수업 중인데? 양아치냐?

- 쟝이 하도 안 일어나니까 걱정돼서

 

- 계속 보고 있었지

 

 쟝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마음을 가라앉힌 뒤 아무렇지 않은 척 마르코에게 답장을 보냈다. 우리 집 올래? 마르코로부터 주소를 알려 달라는 문자가 온 건 오 분 뒤였다. 이미 학교를 빠져나온 뒤에 주소를 물은 건지 쟝의 집에는 십 분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마르코의 빠른 도착에 당황한 쟝이 황급하게 세수를 해야 했다.

 

그렇게 만난 둘은 별걸 다 했다. 마르코가 쟝의 집에 온 하루 동안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마르코가 직접 차린 저녁을 나눠 먹기까지 했다. 저녁을 먹고도 단 게 먹고 싶다는 쟝의 말에 편의점까지 다녀왔다. 전형적인 데이트 코스다. 하고 쟝은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 마르코는 의외로 공포 영화를 잘 봤고 FPS 게임은 젬병이었다. 알게 돼서 좋았다. 쟝은 이런 하루가 계속되길 바랐다. 사실 마르코만 있으면 다 좋을 것 같았다.

 

 

9

기말고사가 끝나고 마르코와 쟝은 제비뽑기로 짝이 되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책과 문제집을 들고 쟝이 앉은 쪽으로 다가오는 마르코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좋냐."

 

옆에 앉은 마르코한테서는 비누 냄새가 났다. 마르코가 청소한 뒤의 음악실에서 은은하게 풍기던 냄새였다. 바로 옆에서 보니 주근깨도 선명했다. 턱을 괴고 아직 웃고 있는 마르코에게 핀잔을 주듯 물었다. 좋냐. 마르코는 부정 한 번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쟝도 좋잖아."

"어딜 봐서."

"쟝을."

 

얼굴이 빨개. 마르코가 쟝의 귀를 쓰다듬었다. 여기랑 목도.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마르코의 볼을 양손으로 잡고 있는 힘껏 꼬집었다. 아, 아, 쟝, 아파. 꼬집은 곳이 빨개져 눈물을 매달고 쳐다보는 마르코에게 쟝이 대꾸했다.

 

"지금은 네가 더 빨개."

 

그러니까 이제 닥쳐. 교과서에 고개를 처박고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짜증 나지도 않는지 마르코는 또 실실 웃었다. 하하, 귀여워.........

 

 

10

야, 야. 대답 안 해?

체육 대회 일주일 전이었다. 체육 부장이 마지막까지 대회 준비를 한다며 점심시간에 모두를 운동장으로 집합한 탓에 땡볕에서 공을 차고 돌아오던 참이었다. 마르코는 체육 대회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했다. 혼자 교실에서 재미도 없는 책을 읽고 있을 것이 영 마음이 쓰여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가장 먼저 교실 문을 열었을 때, 마르코의 옆에는 누군가 있었다. 작년에 쟝과 같은 반이었던 C였다. 뭐가 웃긴 건지 이죽거리며 마르코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거듭 때리고 있었다. 뭐야 저 새끼. 이를 갈고 다가가 C의 손을 낚아챘다.

 

"뭐 하냐?"

"뭐, 뭐야. 아, 쟝이네. 그게... 오늘 우리 엄마 생일이라 돈이 좀 필요해서. 너희 반에 이 새끼밖에 없길래 좀 빌리려고 했는데. 아, 얼마 안 되는 돈이었어."

"너...."

"어쨌든 친구끼리 그깟 돈 빌리고 빌려줄 수 있는 거잖아? 얜 엄마 없으니까 축하할 생일도 없고. 근데 내일 바로 갚겠다는데도 내 말 무시하고 책만 처읽잖아."

 

보육원 사는 고아 새끼가. 쟝이 C의 얼굴에 냅다 주먹을 꽂았다. 키, 키르슈타인... 이 개새끼가! 나동그라진 C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로 쟝을 노려봤다. 

 

"운 좋게 가진 게 대단한 건 줄 알고 우쭐대고 있네 개새끼가. 야. 그거 알아? 다 가져도 썩어 빠질 수 있어. 딱,"

 

너 같은 새끼들. 그리고 마르코가 너보다 형이니까 존댓말 해. C는 어느새 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코피, 코피.... 야이씨... 자기도 반말 하면서!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씩씩대는 C에게 대꾸했다.

 

"난 잘생겼으니까 예외지 새끼야."

"뭐 이런 새끼가...!"

"네 비위 상하는 얼굴로 예의까지 없으면 그건 씨... 용서가 안 되잖아."

 

 마르코가 침착하게 킬킬대는 쟝을 가로막았다. 나 괜찮아. 진정하고 밖으로 가자. 교실 밖으로 쟝의 등을 떠미는 얼굴이 묘했다. 처음 보는 마르코였다. C는 이제야 비척거리며 일어나 쟝을 째리는 중이었다. 너 내가 신고할 거야! 쟝은 곧장 뒤돌아서 중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마르코는 조용했다. 평소처럼 웃지도 않았고 말도 한마디 없었다. 그걸 알아챈 뒤에야 쟝은 후회했다. 마르코가 계속 C를 무시했으면 끝날 수도 있었던 일이 쟝이 화를 참지 못해 주먹다짐으로 번졌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화났나? 마르코는 쟝의 손을 잡아끌어 음악실로 데려갔다. 언제나처럼 책상 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쟝이 힐끔힐끔 마르코의 눈치를 보며 사과했다.

 

"야, 미안.... 끼어들어서. 화났냐?"

"응? 아니야. 화 안 났어."

"화났다고 해도 이해해. 미안해."

"아니, 진심이야. 기분이 이상해서."

"뭐가?"

"방금 쟝이 나를 감싸 준 게 옳은 건지 아닌 건지 나도 몰라. 내가 쟝한테 고마워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도. 근데 그냥...."

 

쟝이 나한테 마음을 써 준 게 좋았어. 그게 다야. 쟝을 바라보는 마르코의 얼굴이 빨갰다. 쟝도 마찬가지였다. 말문이 막혔다. 오랫동안 입술만 달싹이며 마르코와 눈을 마주쳤다. 하마터면 하면 안 되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11

마르코에게 전화를 건 것은 아내의 생일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여보세요?"

"... 나야. 키르슈타인."

"아, 쟝이구나."

"왜 전화했어?"

 

쟝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말해놓고는 마르코가 몇 년 만에 연락한 친구에게 그게 무슨 말투냐며 핀잔을 줄까 긴장을 하고 있던 차였다.

 

"왜냐니."

".........."

"보고 싶어서 했어."

 

항상 그랬잖아. 마르코는 태연했다. 쟝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보고 싶어도 못 보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잘도 보고 싶다는 말을 한다 싶었다. 그런데도 한마디 하지 못했다. 끊이지 않는 정적에 마르코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래?

 

"...... 나 결혼했어."

 

쟝이 막힌 숨이 트이듯 말했다. 마르코는 짧은 시간 조용해졌다. 하지만 곧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축하해."

 

전부터 결혼하길 원했잖아, 쟝은. 귀를 귀울여 보면 알 수 있었다. 마르코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쟝이 한숨을 쉬었다. 피하고 싶지도 않았고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르코, 우리 만날까?"

 

 

12

방학이 되었다. 마르코는 거의 매일 쟝의 집에 왔다. 처음에는 마르코가 수학 학원을 그만둔 쟝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기 위한 취지의 만남이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분위기는 느슨해졌다. 공부를 하다가 금방 영화를 보기 시작한 날도 있었고 아예 공부를 하지 않은 날도 있었다. 공부 모임은 어느새 영화와 게임 등 공부 외의 것들을 찾아 하는 잡탕 모임이 되어 있었다. 문제는 마르코와 쟝이 모두 다 이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였다는 것이다.

 

쟝은 마르코가 사는 보육원까지도 방문했다. 마르코가 초대한 것은 아니고, 쟝이 마르코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 알고 보니 마르코가 사는 곳은 쟝이 사는 곳과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래서 짧은 거리를 빌미로 그날부터 피곤하지 않은 날이면 모두 마르코를 집에 데려다줬다.

 

"마르코? 아는 사람이야?"

 

한바탕 게임을 한 후에 마르코를 데려다주기 위해 보육원 앞까지 함께 걸어온 날이었다. 보육원 앞에 웬 수상한 남자가 모자를 눌러쓰고 쪼그려앉아 있었다. 마르코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쟝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래? 마르코의 얼굴이 어두웠다. 마르코는 다급하게 쟝을 떠밀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웠어. 잘 가."

 

그날 쟝을 등지고 남자에게 다가가는 마르코의 모습은 왠지 가여워 보였다. 그런데도 쟝은 뒤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남자와 마르코의 사이에 끼어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13

그 뒤로 마르코를 볼 수 없었다. 문자도 전화도 수도 없이 많이 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보육원에도 찾아갔지만 이제 마르코는 없다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답장만 해 준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르코가 있는 곳이 어디든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쟝은 왜인지 알고 있었다. 쟝에게 답장을 하지 않은 것도, 쟝을 찾아오지 않은 것도 마르코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리고 보육원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누구인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오래 전에 S가 반 학생들에게 떠들던 이야기였다.

 

마르코 그 형 아빠가 죽은 건 아니래. 근데 안 사느니만 못하게 살아서. 자퇴한 것도 아빠 때문이야. 그 형 착하잖아. 아빠가 술 먹고 찾아와서 자기를 때렸는데도 가만히 맞고 있었나 보더라고. 완전히 막 피칠갑에 돼서는. 동네에 굴러다니고 있는 거 누가 신고해서 간신히 살았다고 하더라. 그 꼴로는 학교를 다닐 수가 없으니까 관뒀다고 하더라. 야, 근데 나 같으면 아빠라고 안 봐줬어. 한 대 쥐어박고도 남았다.

 

잘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다시 대화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잘 지내는지 알 수만 있다면 다른 건 다 필요 없었다. 말도 없이 떠난 마르코에게 서운한 적은 없었다. 처음부터 마르코와는 친구 따위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쟝은 단지....

 

단지 마르코를 좋아해서. 그래서 안부가 궁금했다. 그뿐이었다.

 

 

14

방학이 시작하고 마르코와 쟝의 집에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었다. 마르코가 좋아한다는 세 시간짜리 영화를 시청한 뒤 불을 끄고 누웠을 때였다. 마르코를 등지고 누운 쟝이 졸음으로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나는 사실 너 처음 봤을 때 나랑 친구가 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

"왜 그렇게 생각했어?"

"그냥.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았어."

"상처잖아."

"너는 어땠냐. 나 처음 봤을 때."

"나는 교실에서 처음 본 게 아니야."

 

쟝이 돌아누웠다. 방 안이 어두컴컴해 마르코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 언제?"

"작년에. 친구들이랑 모여서 학원으로 돌아가는 거."

"나 보고 무슨 생각 했는데?"

"운명이다?"

"구라 말고."

"진심이야."

 

이게 어디서. 손으로 마르코의 얼굴을 더듬어 볼을 잡아당겼다. 아, 아. 마르코가 아픈 시늉을 했다.

 

"그러니까 똑바로 말하라고."

"사실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래?"

"응, 근데 그때는 다닐 수 없는 상황이라서... 꽤 고생했어."

 

쟝은 대꾸하지 않고 수긍하듯 끄덕였다. 마르코는 자퇴 후 2년에 대해 쟝에게 말한 적 없다. 캐물을 생각은 없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해 주기를 바랐다. 쟝의 답을 기다리던 마르코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쟝은 운명이 뭐라고 생각해?"

"뭐, 돌고 돌아 다시 만난다... 그런 거 아닌가."

"하하, 그럼 우린 이미...."

 

마르코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쟝은 천천히 잠들었다. 오늘은 웬일로 마르코가 우스갯소리를 한다, 고 생각했다.

 

 

15

마르코와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쟝의 집에서 가까운 카페였다. 분명 저녁 8시에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지만 쟝은 예정보다 빨리 카페 앞에 도착했다. 기분이 영 싱숭생숭해 일찍 집을 나온 것 때문이었다. 아내에게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고 온다고 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마르코와는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왜인지 죄책감이 들었다. 몇 년 간 사랑을 연기하면서도 한 번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분명 고등학생 때는 마르코를 다시 만났을 때 하고 싶은 말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처음 마르코에게 전화가 왔을 때도, 용기를 내서 마르코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결혼을 했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 외에는. 그건 쟝의 잘못이 아니었다. 마르코가 쟝을 힐난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꼭 마르코를 배신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 마르코를 만난다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만나고 싶었다. 수 년 동안 웃음이 적어졌는지 아니면 더 많아졌는지 살이 빠졌는지 올랐을지 궁금했다. 쟝이 없었을 때의 마르코를 모두 알고 싶었다. 시덥잖은 것들을 묻고 싶었다. 전처럼 지낼 수 있다면 더 좋을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친구처럼. 둘이. 

 

그런데 마르코가 늦었다. 약속 시간이 5분이 지나 있었다. 쟝은 고등학생 때 자신의 행보를 생각하며 오늘만큼은 마르코의 지각을 용서하기로 했다. 하지만 오고 있냐는 문자를 보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미안하다며, 빨리 가겠다는 답장이 왔다. 얼굴을 찡그렸다. 마르코가 약속에 늦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왠지 웃음이 나 입을 손등으로 가리고 웃던 중 굉음이 울려퍼졌다. 쟝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카페의 바로 앞 도로에 웬 트럭이 삐뚜름하게 정차되어 있었다. 쟝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비명을 질렀다. 트럭의 밑에는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손가락만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쟝은 뒷걸음질을 쳤다. 남자였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쟝의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은 이미 신고를 하는 중이었다.

 

마르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제발 받아라. 다섯 번째 신호음이 울렸을 때, 도로에 쓰러진 남자가 또 다시 손을 움찔거렸다. 남자의 옆에는 산산조각난 휴대폰이 있었다. 쟝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남자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휴대폰쪽으로 뻗었다. 쟝은 더 지켜보지 못하고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가까이, 점점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제발 쟝이 아는 그 얼굴이 아니길 바랐다. 운전자의 부주의로 일어난 사고에 휘말린 안타까운, 마르코가 아닌 시민이길 바랐다. 자꾸만 힘이 빠지는 다리로 걸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쟝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토를 할 것 같았다. 남자의 오른쪽 얼굴은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선명했다. 남자의 볼을 뒤덮은 주근깨가... 끔찍할 만큼 선명했다. 남자는 숨을 잘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쟝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왜 울어...."

"마르코, 너, 왜......."

 

쟝은 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쉬지 않고 눈물만 떨어뜨렸다.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졌다. 쟝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마르코! 나는...."

".........."

"나는......."

 

나는 너를.... 구급 대원들이 들것을 들고 응급차에서 뛰쳐나왔다. 보호자가 맞냐는 물음에 쟝은 고개를 끄덕였고 함께 차에 올라탔다. 마르코는 그때까지도 핏발이 돋은 눈으로 쟝을 보고 있었다. 쟝의 마지막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문득 고등학생 때 마르코가 쟝의 집에서 잤던 하룻밤이 생각났다. 마르코의 뜬금없는 헛소리가 떠올랐다.

 

"우린 꼭 다시 만날 거야."

"..........."

"운명이니까... 응?"

 

마르코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뱉는 숨의 양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았다.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쟝은 손을 모으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꼭... 다시 만날 거야.

 

운명이니까.

Schick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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